‘시간은 물체의 운동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1900년대 후반,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미친 이론을 주장했다. 조셉 하펠레와 리처드 키팅은 아인슈타인의 말도 안 되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두 개의 시계 중 하나는 지상에, 하나는 비행기에 둔 뒤 장거리 여행을 했다. 장시간의 여행이 끝난 뒤 두 남자는 즉시 서로의 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의 시계는 지상의 시계보다 느리게 가고 있었다. 두 시계와 한 남자의 이론을 통해 1971년, 인류는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 하나를 풀게 되었다.

인류 최고의 천재, 시간의 비밀을 푼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가 살아있던 1900년대는 마치 폭발하듯 과학적인 궁금증이 풀리던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단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모든 이론의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과학을 잘 모르던 일반인들에게도 시공간의 개념을 전달하는가 하면 그의 이론에서 비롯된, ‘빛과 유사한 속도를 지닌 우주선을 개발하면 그 안에서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등의 공상이 즐겁게 퍼져나가며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그의 이론이 학계와 일반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우주에 관한 굵직한 이론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부터 출발하여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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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시간의 만남

▲ 아인슈타인과 론진 시계. 출처=핀터레스트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어린 그에게 주머니 나침반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어린 소년은 나침반의 기민한 움직임에 매료되었고 곧 보이지 않는 힘이 나침반의 바늘을 제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작은 사건은 아인슈타인에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03년, 20대 초반의 아인슈타인은 호기심만을 지닌 채 어두운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 하나 없었고, 자신의 앞날에 대한 허망한 생각만이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자살까지도 생각했을 만큼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학교 친구 그로스먼이 아인슈타인을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에서 근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당시 스위스는 철도의 발전 덕에 시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로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시간을 전기적, 기계적으로 만드는 것을 평가하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시계의 만남이었다.

기계장치로 표현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 아인슈타인은 곧바로 시계와 시간에 매료되었다. 시간을 유형으로 동기화하는 ‘동시성’에 관한 특허로 둘러싸인 공간은 아인슈타인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공간과 시간 사이의 중요한 관계에 대한 그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계와 관련된 일을 시작한 뒤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05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대표적인 이론,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인류 최고의 두뇌가 밝혀낸 세상의 비밀이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저 기차는 7시에 여기에 도착한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내 시계의 작은 바늘이 7을 가리키는 사건과 기차가 도착하는 사건이 동시적 사건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이 시계 부서에서 일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 그야말로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시계
아인슈타인의 시계에 대한 기록은 1931년부터 시작하는 기록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시계와 관련한 특허청에서 근무했던 기록과 실제 생활에서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그의 일대기를 보면 시계를 필수로 들고 다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이 착용했던 론진의 손목시계. 출처=안티쿼럼

아인슈타인에 대한 기록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시계는 1929년 제작된 토노형 케이스의 론진 시계다. 여담으로, 일오차가 7초밖에 나지 않는 정확성에 아인슈타인이 크게 만족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사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즐겨 찼던 시계로 볼 수 있다. 그가 찬 론진의 시계 조형을 배경으로 찍은 재미있는 사진도 있다. 짐작하건대, 당시 론진 시계의 프로모션이 아니었을까 싶다.

▲ 론진 손목시계 조형물을 배경으로 찍은 아인슈타인의 사진. 출처=핀터레스트

이 시계는 2008년 뉴욕 앤틱쿼럼 경매에 등장해 론진 시계 역사상 가장 높은 금액인 59만 600달러에 낙찰되었다. 뒷면에는 “1931년 2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라고 적혀있다. 여담이지만 이 시계는 직접 구입한 시계가 아니라 론진 사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다.

▲ 공식 석상에 등장할 때의 아인슈타인. 출처=핀터레스트

또 한 가지 기록에 남아있는 시계는 아인슈타인이 중요한 자리에서 수트를 입을 때 들고 다녔던 론진의 회중시계다. 공식 석상에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지만 이 시계가 아인슈타인의 시계라 확언할 수 있는 이유는 론진의 괴물 같은 기록력에 있다. 1943년 9월 6일 스위스 쌍띠미에(Saint-Imier)공장에서 생산되어 1946년 1월 29일 취리히의 Stahel Jewelers에서 판매되었다는 인보이스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회중시계를 장남인 한스 알버트에게 물려주었으며, 미망인 엘리자베스 아인슈타인 로보즈(Elizabeth Einstein Roboz)가 평소 아인슈타인을 잘 챙겨주었던 스위스 외교관 헨리 E 보바이(Henry E. Bovay)에게 선물했고, 이후 베른(Bern)의 역사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1980년 파텍필립 광고. 출처=파텍필립

마지막 기록은 파텍필립의 시계다. 1915년 골드 모델로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파텍필립은 이 기록을 1980년 광고에 사용했다.

▲ 1953년 뉴저지, 아인슈타인. 출처=핀터레스트

아인슈타인은 노년까지 시계와 함께했다. 아인슈타인이 타계하기 2년 전 찍힌 사진에도 그의 왼쪽 손목에는 시계가 우직하게 채워져 있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시계와의 만남은 시간과의 조우였고, 인류의 두뇌로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시간의 대가 또한 론진의 정확한 시간 표시에 의존했던 역사를 생각하면 인류 역사에서 손목시계가 사라지는 날은 아직 한참 먼 것으로 보인다.

훗날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이론 중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에서처럼 그는 우연의 산물이나 불확정한 상황을 무척이나 불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이론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운동하는 시계에 용수철이 진동하게 되면 이미 시공간으로 확장된 시점이 한 번 더 늘어남으로 불확정적으로 멈춰 있는 시계와의 에너지가 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시계를 통해 최고의 이론을 확립한 그도 시계를 통해 다른 이론을 반박 당한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에서 시계의 역할이란,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문헌>

파텍워치 블로그스팟, 타임피스 서울투베이징, 아인슈타인 A to Z, 다큐멘터리 빛의 물리학, 논문 갤리슨: 아인슈타인의 시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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