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

: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 또는 그 사실에 대한 기록

 

한 해를 돌아보는 방법으로 뭐가 좋을까?

새롭게 등장해 인기를 끈 신조어를 살필 수도 있을 것 같다. 2016년은 삼포시대를 지나 ‘혼밥’, ‘혼술’의 시대로 접어들고, 뭣이 중한지 모르는 ‘한국 남자(한남)’를 향한 울분이 화산처럼 터진 해였다. ‘꽃길만 걷자’고 다짐했지만 헬조선에 살고 ‘순실증’에 걸린 처지라 다들 속이 답답했을까. ‘사이다’를 벌컥 들이키고 ‘팩트폭력’에 환호를 보낸 해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서사시인 호메로스를 비난한다. 그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헬레네와 파리스는 이집트에 억류되어 트로이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호메로스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허구적인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의심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부족한 면이 없지 않지만, 헤로도토스는 동시대인과 비교할 때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고 사실에 근거해 글을 쓰고자 했다. 그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자 하는 노력이 역사학을 지탱해온 유일한 동력은 아니었다. 역사가 소중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종교개혁 직후 구교와 신교의 경쟁은 근대 역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자기 종파의 전통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각각 역사 서술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역사학이 지금처럼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도 당시 새롭게 형성된 민족국가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역사학이 ‘국사’라는 형태로 제공할 수 있어서였다.

사실(팩트)를 중시하는 태도가 그 자체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팩트-폭력’이라는 말은 최근 온라인 토론문화에서 ‘팩트’가 주로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걸 스스로 제보한다. 일례로 일간베스트(일베) 회원들은 유독 ‘팩트’를 모으는 데 공을 들인다고 하는데, 논적을 조롱하고 논파하는 무기로 그만큼 유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거는 현재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은 오직 타인에게만 적용된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식상하기까지 한 역사학자 E. H. 카의 말,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나누는 대화’라는 말은 팩트가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자세 하나를 알려 준다. 여기서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 건 저 ‘대화’의 주체가 누구냐이다. 너무나도 명백하게 과거와 현재가 대화의 주인 같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막상 그렇지 않다. 이 책의 주제를 담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못한 한 대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는 ‘완전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액턴의 자신감에 동조하는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에 비해서 보다 영속적이고, 또 완전성과 객관성이 더 많은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역사가들이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에 대한 이해를 향해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강연 때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역사란 과거의 여러 사건과 차차 나타나는 미래의 여러 목적 간의 대화라고 불렀어야 옳았을 것이다.”

역사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며, 놀랍게도 그 대화의 주인은 현재가 아니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목적이 대화를 나누고, 현재를 사는 역사가는 오히려 대화의 손님이 된다. 객관(客觀)이란 말 그대로 손님의 자리, 중심이 아닌 자리 자리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역사의 객관성은 단순히 팩트 더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상대화하고 성찰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역사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만이 역사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