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이 시작됐다. 기업 CEO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신년사를 전했다. 긍정적 뉘앙스의 키워드가 난무했다.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건 ‘혁신’이다. 우리에게 혁신이란 무한한 긍정 이미지를 풍기는 단어다. 그러니 이 말을 자주 써먹는다고 손해 볼 건 없다. 한편에서는 개나 소나 혁신이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은 혁신 사회인가. 혁신적 성취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고들 분석한다. 최근 듀오휴먼라이프연구소에서는 미혼남녀를 조사해 ‘2016년 이상적 배우자상’을 발표했다. 여러 조건이 뒤따랐는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남녀 모두 이상적 배우자의 직업으로 공무원·공사를 지목했다.

무얼 의미하는가.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돈벌이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풀이된다. 말로는 혁신을 외치면서도 행동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싹수 있는 사회일수록 리스크 테이킹(Risk-Taking)을 하지만 우린 똑똑한 사람들이 이를 피합니다.”

 

기업들도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 국내외 기업 다수에서 임원을 지낸 A 씨는 말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외부 인물을 임원으로 뽑으면 처음에는 그가 제시한 방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 지나면 전부 조직에 적응시키려고 해요. 대부분 결과적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죠. 우린 말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안 그러죠.”

이런 분위기는 리스크 테이킹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여러 산업군에 발견되는 현상이다. 일례로 한 게임사 대표는 이런 얘기를 전했다. “지금 게임 업계는 ‘자본을 많이 들이는 것’ 그 틀에서 벗어나진 못하는 것 같아요.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리스크 테이킹이 쉽진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 엄청난 자금을 들여 나온 게임이 유저에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죠. 딱 돈 들인 값 정도만 하는 그저 그런 게임이 나오는 거죠.”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다른 측면에서 한국의 고유한 위험 감수 문화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우리가 빨리빨리 문화를 동력으로 삼아 위험을 감수하며 압축 성장을 이뤄냈다는 설명이다. 변질된 위험 감수 문화는 정치인·기업인 등을 중심으로 법적·도덕적 위험까지 감수하는 걸 포함하는 개념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들이 이를 감수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고 강준만 교수는 지적했다.

“직원이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확 잘라버리죠”

한국 기업들이 리스크 테이킹을 멀리 하는 이유는 뿌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글로벌 혁신 기업의 경우 뿌리부터가 혁신 문화에 기반을 둔 경우가 많다. 반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전통산업을 통해 성장한 이후 위에다 첨단산업을 덧씌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전히 수직적 위계질서가 잔존하고 있으며 혁신 문화와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IMF 사태를 겪으면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자’는 식의 사회 의식이 생겨났다. 성취지향성보다는 안정지향성이 한층 강화된 셈이다.

실패를 대하는 태도도 리스크 테이킹을 어렵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해 낙인을 찍는다.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모럴 해저드로부터 찾아내려 한다. 예컨대 아이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수없이 쓰러져야 한다. 그런데 사회에서 한 번 쓰러지면 ‘쟤는 실패자야.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닐까?’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이기 일쑤다.

이는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A 씨는 전했다. “직원이 도전했다가 실패해봐요. 확 잘려버리죠. 그러니 누가 도전합니까? 시무식에서 CEO가 어떤 실패든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도전하자고 얘기한다면 직원들은 의심부터 합니다. ‘저게 진짜일까?’ 어쨌든 연말 인사고과에서 숫자로 성과를 보잖아요.”

기업이든 개인이든 실패에 따른 충격을 감당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실패하더라도 치명상을 입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완충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탓도 있다. 그러니 실패를 쉬쉬하고, 도려내고, 성공에만 집착한다. 애초에 실패 위험이 있다면 굳이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미래를 향한 비전은 불품없어진다.

관(官) 주도 혁신의 한계, 왜곡된 기업가 정신

박근혜 정부도 출범 당시 이런 상황에 문제의식을 가진 걸까. 출범 초기부터 줄기차게 ‘창조경제’를 얘기해왔다. 정부는 전국 각지에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거점을 만들어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정부 주도로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요 대기업들은 지역 거점에 위치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떠맡게 됐다. 일각에서는 반강제적으로 기업들이 가담한 것일 뿐, 이를 통해 진지하게 미래 먹거리를 찾으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말한다.

관(官) 주도 벤처 육성 전략에 추진에 따라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다. 스타트업 성공 신화도 곳곳에서 들려온다. 이제 ‘회사 다니다 돌연 퇴사해 사업 말아먹어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 이야기’를 스타트업 성공담이 대체하고 있다. 취업난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창업은 취업의 ‘가능성 있는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리스크 테이커가 등장할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진 걸까?

이면에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스타트업 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2년 전에 모 대학에 강연을 갔을 때는 20~30명이 참가했습니다. 얼마 전에 갔더니 300명이 왔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스타트업 창업 경험을 이력서에 기입하면 대기업이 우대한다고 하더라고요. 창업이 목표가 아니라 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스펙을 쌓는 형태죠.” 거품의 흔적이다.

현실은 스타트업 10개 중 4개가 1년 내 문을 닫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강조되는 것은 기업가 정신과 성공 신화다. 왜곡된 인식으로 문제를 묵인하는 구조다. 결국 눈앞에 신화만 남고 실패는 사라진다. 리스크 테이킹에 따른 혁신은 요원해진다. 혁신보다는 실패를 부르는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