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님, 정말 대전에서 성심당이 그렇게 유명해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주문한 책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김태훈 저, 남해의봄날)>이 도착하자마자 읽고 대전에 가면 성심당을 꼭 들르리라 마음먹었죠. 마침, 지난 연말에 대전에 위치한 KT인재개발연수원에서 강의를 마치고 대전역 가는 택시에서 기사 아저씨에게 이렇게 취조(?)를 시작했습니다. 책으로 말로만 듣던 그 명성을 알아채는 데 2시간이면 충분했다면, 확인하는 데는 택시 안에서 20분이면 풍족했습니다.

# 대전역에 멈춘 통일호

성심당과 대전역은 운명처럼 엮여 있습니다. 임길순(성심당 창업자)과 그의 가족을 실은 서울 가는 통일호가 고장으로 대전역에 멈췄습니다. 임길순은 대전역 앞에 천막을 하나 세우고 찐빵 파는 노점을 내고, 성심당(聖心堂)이라는 나무 팻말을 세웠습니다. 성심당은 이렇게 대전역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브랜드 이름인 성심당의 성심(聖心)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임길순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 나눔의 시작이 된 대전 대흥동성당

나눔을 위해 만들었다는 빵집 성심당은 대흥동성당의 보좌신부인 두봉 신부를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그 뜻은 크게 펼칠 수 있었습니다. 임길순은 하루 장사를 마치고 남은 빵은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봉사단체에서 궂은일도 도맡아 했습니다. 성심당은 그때부터 실행한 나눔을 지금도 하루에 팔고 남은 빵은 고아원, 노인정 등에서 사람과 나눈다고 합니다. 하루 빵 생산량의 3분의 1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기부한다니, 어쩌면 성심당은 나눌 만큼 충분한 양의 빵을 만들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 모두가 함께 한 위기와 부활 스토리

1980년 튀김소보로, 1983년 포장빙수, 1985년 생크림 케이크로 성심당은 대전 시민과 수많은 스토리를 만들며 대전의 브랜드로 성장했으나, 이후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출현, 트렌드의 변화 등 슬럼프와 악재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2005년의 성심당 본점 화재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죠. 하지만 기적처럼 일어난 직원들의 투지에 감동을 받은 사장 임영진(현 대표이사)과 직원의 노력으로 성심당은 다시 부활 스토리를 쓰게 되었습니다.

# 대전역 경주빵집? 부산오뎅?

성심당의 대전역 귀환은 대전시청에서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대전 시장이 실국장들과의 회의석상에서 “대전역에서 기차를 탈 때 보면 ‘경주빵집’이 눈에 들어오고, 내리면 ‘부산오뎅’ 간판이 보이는데 ‘성심당 빵집’과 같은 향토 제품도 널리 알릴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있은 후 경주빵집, 부산오뎅이 아닌 대전의 대표 브랜드인 성심당이 대전역에 입점하게 되었습니다. 1956년 대전역 앞 노점에서 시작한 성심당이 다시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셈이죠.

 

# 나의 도시, 나의 성심당

“대전을 벗어나 서울에 자리 잡은 성심당을 과연 성심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물론 돈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겠지만 돈을 많이 버는 대신 우리의 본질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성심당이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 성공을 거두자 서울 롯데백화점의 입점 요청이 왔을 때, 성심당의 안주인인 빵마담 김미진이 한 말입니다. 그리고 6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엠블럼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도시, 나의 성심당.” 이는 누구나 자신의 도시 안에서 자신의 도시를 사랑하며 지역의 가치 있는 기업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의지랍니다.

택시가 20분쯤 달려 대전역에 다 와서야, 택시기사의 성심당 수다는 끝이 났습니다.

“그럼요, 성심당은 대전의 자랑입니다. 대기업에서 만든 유명 베이커리 빵들과 섞어놓아도 성심당 빵은 그 맛만으로 찾아낼 수 있죠. 또 등산 갈 때, 성심당 빵 두 개에 우유 하나면 든든합니다. 재미난 일도 있죠. 얼마나 유명했으면 성심당 빵으로 기사들이 제비뽑기 내기도 했었죠. 다른 빵 중에 성심당 빵을 뽑은 사람은 그날 내기 돈을 다 차지하죠. 암튼 성심당은 대전의 자랑입죠…. 참, 출장길이시면 올라갈 때 꼭 성심당 빵 사가세요. 부인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 대전역 성심당 전경 _ 촬영: 김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