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어느 날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역사에 대한 통찰과 선행 사례에 대한 꾸준한 분석을 통해 켜켜이 쌓인 지혜와 비판적인 아이디어들이 뭉쳐져서 ‘조합’의 결과로 나타난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혁신이 ‘창조적 파괴’이자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의 ‘창조적 결합’이라고 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성경 구절도 있듯, 우리는 늘 혁신을 ‘인식’할 뿐이지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떨어진 새 발상을 가질 수 없다.

필자는 고려 청자에서 우리 안의 혁신 유전자를 본다. 세계 각국의 각종 혁신 상품 사례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의 한계점을 분석한 다음, 새로운 원리와 접근법으로 조합하여 ‘물건’을 만들어 내는 놀라운 정신을 본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로 ‘금구자기’를 들고 싶다. 고려 시대부터 만들어져 조선 초중기까지 쓰였던 이 도자기는 그릇의 입 부분에 도금 처리를 하거나 몸통에 금장 처리를 하여 왕실이나 귀족층 사이에서 쓰였던 아이템이었다.

금으로 식기나 다기 주변을 장식한다는 것은 권력과 부를 한 몸에 안은 사람이 쓴다는 사실을 뜻했다. 고래(古來)로 금은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그리고 장수와 무병의 상징이었다. 스키타이 민족 때부터 북방인들은 금이 갖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믿었다. 이 신비의 금속을 청자와 결합시켜 새로운 결과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놀라운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금구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왜 우리의 혁신 유전자가 발견될 수 있을까. 우선 청자의 색깔, 몸통, 처리방식 측면에서 송나라나 원나라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 변화가 나왔기 때문이다. 도자사(陶瓷史)는 기술 혁신의 역사다. 어떻게 굽고 처리하느냐가 제품 생산 방식의 변화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일상 변화와 매우 밀접한 이슈다. 중국에서 만들어 진 금구자기는 겨우 자기의 입 주변을 장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고려 이후로 한반도에 들여 온 금구자기는 송나라의 단출하고 매무새가 또렷한 모양뿐만 아니라 색깔의 명징함, 그리고 사용성 측면에서 매우 우수했다. 중국 금구자기가 ‘망구’라고 하여 금장식이 금방 떨어지거나 만드는 과정에서 망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던 반면, 고려 자기에서는 거의 완성된 형태로 금 도금 처리가 되어 있다. 제품의 무결성은 완벽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과 직결된다. 혁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 청자은제도금투조수금문완(청자은제도금투조수금문완), 높이 7.3㎝, 입지름 17.5㎝, 바닥지름 5.1㎝. 개인소장.

필자가 재미있는 사례로 들고자 하는 ‘청자은제도금투조수금문완’은 금구자기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혁신적이고 현란한 결과물이다. 일반적으로 금구자기가 ‘구연부’, 즉 도자기의 입 주변만 장식 처리하는 경우가 보통이라면, 이 그릇은 몸통까지 완벽하게 금장이 되어 있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장수와 신비를 기원하는 앵무새도 삽입되어 있고, 북방의 기마 민족 전통을 잇는 요대(遼代) 자기가 지닌 모습도 엿보인다. 생산자는 이미 송나라, 요나라, 고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엮어 풀어내는 창조적 심미안과 글로벌한 시각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려하지만 도자기로서의 본령을 잃지 않게끔 내부는 완벽하게 도예로만 처리했다. 사용자를 배려하는 자연스러운 기능과 장식의 결합을 도모한 케이스다.

필자는 흔하디 흔한 ‘창조’와 ‘혁신’ 팔이보다 금구자기와 같은 우리 고유의 예술적 전통에서 진정한 혁신 유전자를 발견하곤 한다. 기존의 것들을 무수한 시나리오와 옵션을 거쳐 배합하고자 노력하는 열정,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 간의 창조적 조합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그 어떤 경영학 케이스 스터디보다 교훈적이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