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포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은 국정농단 얘기로 뒤덮여 있다. 이 사태가 곪아 결국 터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에 예방할 순 없었던 것일까.

한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이 나라는 정치와 언론이 망쳤다.” 지극히 공감되는 말이다. 만약 이 땅에서 정치와 언론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현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을까.

결국 답은 구할 수 없다. ‘제대로’의 기준도 없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만족시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2016년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등 예상치 못한 굵직한 이벤트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즉 ‘반(反) 신자유주의’ 물결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잘못된 것일까. 반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면 더 나은 세상이 오는 걸까. 그 어느 쪽도 섣불리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부정부패는 반드시 척결돼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 이후 어떤 방식이 우리 사회를 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고민이다. 그만큼 변화란 설레고 행복한 꿈을 꾸게 하는 반면, 한편으로는 두려운 존재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분명 잘못됐는데 이를 두렵다고 움츠리는 것은 분명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정치, 경제, 사회 그 모든 측면에서 말이다.

특히 언론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정부의 압력과 기업의 광고·협찬 등에 저널리즘을 내줄 것이라면 왜 언론이 필요한가. 어떤 대상에게 ‘변화하지 않는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도, 변화하는 대상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언론이다. 그러나 언론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 종이신문에서 온라인, 모바일 등 기사를 전달하는 도구만 바뀌었을 뿐, 과거와 똑같다. 변하지 말아야 할 ‘저널리즘’은 내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떻게 저널리즘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통해 변해야만 한다. 만약 그 답을 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체제가 이 땅에 뿌리내려도 그 뿌리는 결국 썩고, 저널리즘도 동시에 썩을 것이다. 아마도 먼 훗날 기자는 후배들에게 ‘이 나라는 정치와 언론이 망쳤다’는 말을 고스란히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의 힘이 강해진다

<마이너스 금리의 경고>의 저자 도쿠가츠 레이코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기자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 경제와 한국인들을 위해 조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주말마다 열리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뜻은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점차 강해질 것이며 이러한 현상이 정책을 주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될 것이란 의미였다.

최근 페이스북 등 SNS만 봐도 그렇다. 많은 일반인들이 SNS에서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끌기도 한다. 또 SNS에서 활발하게 토론이 벌어지며 이러한 얘기들은 직접 혹은 언론을 통해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기도 한다.

현재 국정농단 사태를 현 상황까지 이끌고 온 것은 언론의 힘도 있지만 국민 개개인들의 힘은 더욱 컸다. 물론 좌·우 나뉘어 서로를 헐뜯는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과정을 논쟁 혹은 토론이라 한다면 도쿠가츠의 말은 현실이 되는 듯하다.

언론의 미래도 여기에 달렸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수익 측면에서 B2B(기업 간 거래)가 아닌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가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힘이 강해지고 그만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데 이를 거스른다면 변화의 기회는 저 멀리 사라져버린다.

물론 언론의 수익 방향이 반드시 ‘B2C’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런데 ‘어렵다’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닌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변화에 에너지를 쏟기보단 관성의 힘에 떠밀려가는 것이 편한 것처럼 말이다. 기존 언론이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최근 몇 달 동안 언론의 방향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다. 여기서 ‘변하는 건 한순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서서히 변하는 것을 ‘시행착오’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 변화는 한순간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는 과거와 달리 음악, 영화, 게임 등 콘텐츠의 이용 대가를 불법이 아닌 정상적으로 지불하고 있다. 당시에는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익숙할 정도로 한순간에 변한 듯하다.

결국 언론도 한순간에 변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는, 즉 ‘적(敵)은 내부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결국 내부의 적을 어떻게 제거할지는 언론은 물론 이 사회에 남겨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