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사도세자의 구명운동을 해 주기를 바랐음에도 나 몰라라 했던 신하들의 핑계는 간단하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세자의 죽음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를 구명한다는 것은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에 맞서는 것으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며, 자신의 죽음은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홍봉한 역시 그런 이론을 내세울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왕도 갈아치우는 판인데 그깟 같은 파벌의 세자 장인 하나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며, 자신의 죽음은 바로 혜경궁 홍씨와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영조가 쓴 사도세자 묘지문이 대답해 주고 있다.

아무 일 없기를 바랐지만 비보를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영조시대의 정치는 이미 대의명분과 정치도의는 물론 의리라는 단어까지 상실한 채 당장의 이익만을 쫓아서 움직이는 정치꾼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나중에는 그들도 파당에 휩싸여 본래 의도한 정치 이념이 퇴색할지언정, 그래도 처음에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기존의 권력과 맞서 싸우며 정치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림정치에서 보여주던 의리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그런 모든 사정을 알기에 남편을 포기하고 아들인 정조나마 보호하려고 남편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사도세자 죽음 당시에 집권하고 있던 노론이라는 파당의 세력이 이미 왕권을 능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감히 그 누구도 노론에 의해서 뒤주에 갇힌 세자를 살려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핑계는 결국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어떤 의리나 명분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지금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만일 영조가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왕권이 약해서 소용이 없을 수도 있었겠지만, 세자가 원하는 것이 정말로 북벌을 감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영조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라도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 때 북벌을 감행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광활한 영토의 맥을 짚으면서 흘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대부분의 정치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소통의 부재에서 빚어진 현상이라고 치부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시대, 특히 중기 이후의 이런 애사들을 이야기 하다보면 마치 지금 정치하는 이들의 줄서기를 보는 느낌이다.

백성들보다는 권력이 우선하던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붕당으로 귀결되는 이들이 있었을지언정, 정치에 몸을 담는 초기에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자처하고 나서던 사림(士林)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국감은 물론 대통령의 비리를 징벌하기 위해, 촛불을 매개체로 평화롭고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민심이 타오르던 자리에서조차 백성들의 피맺힌 절규는 뒷전에 두고 정국주도권싸움에 열중하던 국회와 소위 잠룡이라는 이름하에 내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통령의 임무가 모든 백성들을 위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이익에 우선하다가 결국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극으로 종말을 맺도록 만든 이 나라 최고 권력자와, 그 잘못을 지적해서 바로 잡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그늘에 몸을 숨기려 모여들어서 줄서기 바쁜 정치인들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제는 동지임을 자부하던 정치인들이 오늘은 반대편에 서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진흙탕도 불사하고 칼날을 세우는 모습이 과연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치부한 채 넘어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이 시대의 사도세자는 누구이며 영조는 또 누구인가? 아니, 정말로 궁금한 것은 이 시대의 노론은 과연 누구이며 그에 맞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세력은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하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투표권으로 이 시대의 노론을 심판하고 싶은데 그 마땅한 향배를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다. 그 방황이 과연 백성들의 판단 부재에 의한 잘못인지, 아니면 이 시대의 전면에 선 정치인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인지에 대해서 대답해줄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가장 큰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