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중심에 선 최순실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는 가운데,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재계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경제 부진과 최순실 사태의 파도를 맞아 나름의 방법론으로 기회를 포착하겠다는 의지다.

삼성은 초비상이다. 특검의 수사가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며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는 돌발변수가 계속되고 있다. 미르 및 K스포츠 재단 출연금과 별개로 최순실과의 직거래 의혹, 나아가 삼성물산 및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의혹까지 터지며 그룹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특검은 26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자택,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집무실과 자택 등 10여곳을 동시다발 압수수색했다.

나아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김진수 청와대 보건복지비서관의 자택도 압수수색해 사실상 삼성을 겨냥하고 있다. 두 사람에 대한 수사는 곧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의 의혹을 정조준한 것이다. 제3자 뇌물수수 혐의까지 번질 수 있는 사안이라 삼성은 잔뜩 긴장하는 눈치다.

삼성은 올해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갤럭시노트7 단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기도 했다. 엘리엇의 공세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으며 대내외적 악재도 만만치 않은 상태다. 인사발표도 하지 못할 정도로 뒤숭숭한 분위기라는 전언이다. 삼성전자는 12월 후반, 사업부장과 임원, 해외법인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글로벌 전략회의를 개최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등기이사 취임, 나아가 비브랩스 및 하만 인수 등 나름의 경영본능을 보여준 상태에서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나름의 동력을 확보할 것이라는 것이 재계의 일반적인 전망이다. 이를 중심으로 그룹 전체의 활력이 살아날 경우, 삼성이 위기극복에 성공할 것이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LG는 상대적으로 최순실 논란과 거리가 멀다. 그룹의 이슈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비선실세와 얽힐 여지가 적었으며, LG 특유의 뚝심경영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양 재단에 돈을 기부한 상태에서 검찰 중간결과 기업들에게 일종의 면죄부가 주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기업들도 그냥 돈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며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SK는 최태원 회장 사면, 롯데는 경영권 분쟁, 한진그룹은 법정관리 이슈 등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LG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고 전했다. '청탁할 것이 없으니 문제가 없다'는 것이 LG의 무풍지대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그런 이유로 LG는 지난 인사를 통해 소위 젊은피를 대거 내세우는 승부수를 던지기도 했다. 구본무 LG회장의 그룹 총괄 경영체제는 그대로 유지되며 구본준 ㈜LG 부회장의 역할이 확대되는 지점이 눈길을 끈다. 앞으로 구본준㈜LG 부회장은 신성장사업추진단장 역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사업 발굴 및 확대를 지원하는 등 사업 전반을 살피는 역할과 함께 전략보고회 등 경영회의체까지 끌어갈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구본준 부회장이 이번 인사를 통해 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말이 나왔으나, 일단은 부회장 직에 머물며 외연을 확장하는 선에 그칠 전망이다.

구본무 회장과 하현회 사장의 지주회사 ㈜LG 각자 대표이사 체제도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되며 구본준 부회장은 LG전자 이사회 의장과 LG화학 등기이사도 계속 맡는다.

특기할만한 부분은 주력 계열사인 LG전자다. 기존 3인 체제에서 고졸신화 조성진 부회장의 원톱으로 변신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인 체제를 바탕으로 동력을 모으겠다는 복안이다. 스마트폰 사업이 살아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초연결을 중심으로 나름의 활로를 뚫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SK는 벼랑 끝 승부수를 던졌다. 삼성만큼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면세점 이슈, 대통령 독대 등에서 최태원 회장의 이름이 다수 거론되는 점이 부담스럽지만 나름의 변화를 모색하는 분위기다.

예상보다 큰 변화가 감지된 인사발표가 단적인 사례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신임 의장에는 의장후보추천위원회에서 의장 후보로 추천된 조대식 SK㈜ 사장이 만장일치로 선임됐다. 조 신임 의장은 지주회사인 SK㈜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나름의 성과를 인정받은 바 있다. 신약개발과 의약품생산, 반도체소재 등 신규 성장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관계사 기업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주도해 왔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새롭게 신설되는 전략위원회 위원장도 겸직한다. ‘따로 또 같이 3.0’ 체제 3기 출범이라는 설명이다.

조 신임 의장은 SK(주) 재무팀장, 사업지원팀장 등을 맡은 바 있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 7개 위원회는 전문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소수 정예화가 핵심이다. 에너지∙화학위원장에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ICT위원장에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 커뮤니케이션위원장에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인재육성위원장에 서진우 사장, 사회공헌위원장에 최광철 사장이 각각 선임됐다. 글로벌성장위원장(유정준 SK E&S 사장)은 유임됐다.

주력 계열사의 CEO가 대부분 젊은인재로 채워진 부분도 흥미롭다. SK이노베이션 사장에 김준 SK에너지 사장을, SK텔레콤 사장에 박정호 SK㈜ C&C 사장을 보임했다. 1사2체제로 운영돼 온 SK㈜ 홀딩스와 SK㈜ C&C는 통합 CEO 체제로 운영키로 하고, 장동현 SK텔레콤 사장을 내정했다. 특히 박정호 신임 사장의 경우 최태원 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추후 SK텔레콤은 ICT 및 플랫폼적 가치에 더욱 빠르게 접근할 수 있을 전망이다.

50대가 전면에 배치된 지점이 흥미롭다. 수펙스추구협의회와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이 모두 50대 CEO 체제에 돌입했다. 실무형 CEO 체제를 바탕으로 실제적인 사업적 방향성을 추구하고 나름의 야생을 기르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대부분의 위원장이 교체된 부분은 향후 SK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줄 전망이다.

SK의 과감한 방향성은 SK하이닉스의 막대한 베팅에도 잘 드러난다.  낸드플래시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충청북도 청주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고 22일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낸드플래시 시장으로 쏠리는 전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흐름과 더불어 중국의 도전, 나아가 SK그룹의 지향점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SK하이닉스의 파괴력은 SK의 중간지주사 가능성에도 힘을 더한다. 현재 SK그룹은 중간지주사 전환을 위한 정지작업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에서 지배구조상 SK의 손자회사인 SK하이닉스가 아들회사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재계의 관측이다. SK텔레콤이 인적분할을 통해 분리된 상태에서 SK 자회사로 SK텔레콤 홀딩스가 들어오면 홀딩스가 ICT 사업을 총괄하는 형태가 유력하다. 여기에서 주식 스압 등의 방식으로 SK하이닉스를 SK의 자회사로 돌리는 시나리오다.

SK하이닉스가 최근 SK그룹 인사에서 위상이 크게 올라간 부분도 의미심장하다. 박성욱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는 한편 SK그룹 최고의결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의 정보통신기술(ICT) 위원장으로도 임명됐기 때문이다. 현재 SK하이닉스는 SK텔레콤 자회사며 SK텔레콤과 SK C&C 수장은 자리를 바꿨다. 장동현 사장이 SK C&C로 이동하고 SK텔레콤 수장은 박정호 SK C&C 사장이 된다. SK 기준으로 보면 아들 회사보다 손자 회사의 수장이 더 높은 직급이다.

이를 바탕으로 SK하이닉스가 SK의 중간지주사 전환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다면 지금까지 약점으로 여겨지던 자동차 반도체 사업 등의 역할도 부여받는 한편, 나름 도약의 방향성을 더욱 선명하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모든 전략은 선 굵은 경영방식을 보여준 최태원 회장의 '결단'에 배경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