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독일의 프리츠 랑이 감독한 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는 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생생하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초의 장편 SF영화이자 '머리와 손을 중재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이 영화에는 인생을 즐기는 부유한 자본가들과 도시의 지하에서 도시를 떠받치는 노동자들의 대립이 등장한다.
2016년, 갑자기 기억의 저편에서 메트로폴리스를 끄집어 낸 이유는 무엇일까. 폐부를 찌르는 질문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이 그리는 미래는 무엇일까? 희극일까? 비극일까? 기술이 발전하면 인류는 윤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나, 아쉽게도 기술의 연금술은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한다. 기술을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자신의 지위를 위해 사용하면 올라가고, 그렇지 않은 부품들은 도태되거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청사진처럼 초연결을 기반으로 모든 기기들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사고하는 시대, 고차원적 지식활동에 매진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그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변화의 파도를 넘었다"고 자부하며 기름기가 번득이는 뱃가죽을 두드리며 태평성대를 말할 수 있을까?
4차 산업혁명...그리고 핀테크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 말의 등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많아졌을 것"이라는 농담이 있다. 뭐야, 창조경제인가? 아니다. 이는 불분명한 미래의 청사진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이다.
하지만 사물인터넷과 산업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센싱기술 등 다양한 기술의 발전으로 초연결 인프라가 전제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초기에는 자율주행차, 스마트홈에서 꿈틀거리던 모든 사물의 지능화는 조금씩 영역이 확장되어 도시, 나아가 국가 전반을 휘감을 전망이다. 빠른시일은 아니겠지만 분명 변화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초기산업의 패러다임이 붕괴되는 지점이다. 우버의 등장으로 택시기사들이 일자리를 위협받고 있으며 에어비앤비의 출현으로 숙박업소의 근간이 위협받는다. 배달앱, 전자상거래, 기타 O2O 사업자의 등장은 모바일 혁명과 함께 소수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 이상의 일자리를 날려버릴 수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이 현존하는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담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솔직해지자. 모바일 기반의 플랫폼 사업자는 특정영역에서 단기적으로 시장의 촉매제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힘의 집중에 따른 선별적 약탈자로 변신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하필이면 '경제의 호황기'가 아닌 '경제의 불황기'에 닥쳐오는 변화라는 점이다. 특히 모바일 사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온디맨드 플랫폼 사업자들이 공유경제의 가면을 쓰고 움직이는 것이 눈길을 끈다. 우버의 등장이 글로벌 경제위기가 극에 달했던 2009년, 경제적 불평등 지수가 두 번째였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이유다.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 공유경제의 가면을 썼기 때문에 생명을 다해가는 기존 자본주의 체제에 대응해 새로운 방식의 경제적 패러다임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기존 자본주의 체제의 변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온디맨드 사업자의 등장이 기존 택시시장을 위협하는 분위기와 연결되며, 나아가 자율주행차의 비전까지 노리는 행보는 이러한 방향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 여기서 하나로 연결해보자.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며 기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 판을 흔드는 온디맨드 사업자가 모바일을 타고 등장했다. 난세는 영웅을 부르는 법. 하지만 그 영웅은 노동시장학적 관점에서 살피면 기존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악질이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난세의 고통받는 민초들은 왜 자신들을 박살낼 수 있는 영웅을 원했는가? 그런 영웅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그냥 세상이 변하기를 바랬을 뿐이다.
국내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한국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실업률은 3.7% 수준이지만 내년 3.9%로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취업자 증가폭은 동기간 29만6000명에서 28만4000명으로, 실업자수는 101만4000명에서 107만2000명으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통계청의 자료는 더 절망적이다. 15세부터 29세까지의 청년 실업률은 2012년 7.5%에서 올해 9.3%까치 치솟았다. 각종 경제적 지표는 줄줄이 하락하고 있으며 절묘하게 최순실 국정농단 논란까지 가세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경기를 부양하던 정부의 노력까지 줄어들 전망이다. 기획재정부의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2020년까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연평균 6.0%씩 감소된다.
철저한, 누가 봐도 심각한 난세다. 그리고 이 지옥도의 헬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며 스타트업에 투신하기도 한다. 기술과 기존 사업의 융합이 시도되며 처절한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다 최순실 일당이 열심히 해먹기도 했단다. 다음으로 돌아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을 박살낼 수 있는 영웅이다.
핀테크, 프랑켄슈타인이 왔다
기존의 전통적인 경제 패러다임은, 가장 오래된 아젠다는 금융이다. 일설에는 성당기사단이 스위스로 도피해 최초의 은행을 만들었다는 학설도 존재하는 가운데, 사실 '돈 놀이'는 구석기 시대 인류가 조개껍질로 물물교환을 하던 시절부터 존재해왔다.
금융업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질적이며 냉정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금융업도 기술의 발전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핀테크의 탄생. 이는 금융업계에 어떤 의미일까? 제발 솔직해지자.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핀테크를 원했던 사람이 누가 있을까? 99.9%는 기존의 방식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기존 금융업 종사자들의 근간을 흔들었고, "같이 해 먹자"고 달려들었다. 거역할 수 없다. 시장이 움직인다. 이런, 젠장.
그런 이유로 기존 금융업에게 핀테크는 재앙이자 괴물이다. 인간과 기계의 만남으로 만들어져 끊임없이 괴성을 터트리는 프랑켄슈타인이다.
불편한 진실은, 이러한 프랑켄슈타인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고, 나아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대목이다. 그러나 가장 큰 현실의 위협은 일자리 문제다. 핀테크로 인해 기존 금융업 종사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핀테크의 본산인 유럽은 벌써부터 몸살이다. 지난 10월 네덜란드 최대 금융기업인 ING는 2012년까지 약 70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한 사례가 극적이다. 노조는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으나 ING는 모바일 기술의 발전으로 선택과 집중을 위한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비슷한 분위기는 미국에서도 감지된다. 올해 3월 씨티그룹이 발표한 보고서가 금융업계를 뒤흔들었다. 앞으로 10년간 금융업계 종사자의 30%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국내도 비슷하다. 국민은행이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희망퇴직을 접수한 결과 무려 2800명이 몰린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 금융업의 매력이 반감되는 상황에서 비전을 상실한 직원들이 대거 몰렸다는 후문이다. 참고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희망퇴직과 명예퇴직으로 지난해에만 은행 임직원 수가 약 2111명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핀테크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보는 시각은 철저하게 금융업 종사자의 입장이라는 점을 밝힌다. 또 핀테크 시장은 날로 성장하고 있으며, 기존 금융권도 빠르게 이를 체화하고 있다는 점도 알린다. 무거운 엉덩이 들어 이제라도 움직이는 것이 어딘가. 아, 지난 11월 고용노동부와 한국경제학회의 '고용영향평가 컨퍼런스'에서는 정부가 규제 완화에 나서고 핀테크 산업이 활발해지면 무려 8만8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발표가 나오기도 했다. 참고다.
그런데 말이야...프랑켄 결말이 어땠지?
핀테크로 대표되는 기술의 발전은 뒤틀린 영웅 서사시를 닮았다. 이는 '기술의 발전이 과연 옳은가?'라는 오래된 고민을 다시 끄집어내며, 나아가 정치 및 사회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떤가. 기술은, 핀테크는 프랑켄슈타인인가? 이 공포스러운 괴물에 쫒겨 사람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당연한 결말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게 나온 것이 없지만, 힌트는 있다. '왜 쫒겨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시간은 나의 편이고, 방법은 분명히 있는데 말이다.
결론을 말하기 전 일본의 스모에 대해 잠깐 말하고자 한다. 스모 (相撲: すもう)는 ‘지지 않으려 버티다, 서로 겨루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스모루(すまふ)’에서 나왔다고 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1년에 6번, 15일간 경기를 연다.
현재 스모의 인기는 대단하다. 국내의 경우 비슷한 운동인 씨름이 사실상 궤멸되어 선수들이 이종격투기, 예능방송 등으로 유출되는 것과는 다르게 스모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씨름도 한 때 국민 스포츠로 추앙받았던 영광의 시절이 있었는데. 이견의 여지는 있지만 전문가들은 '지나친 승패에 집착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거구의 선수들이 씨름판을 장악하며 볼거리가 있는 기술씨름이 아닌, 무게중심의 씨름으로 경기가 변하자 자연스럽게 지루해졌고, 관중들이 떠났다는 설명이다.
반면 스모는 달랐다. 승부조작 혐의가 지적되는 등 위기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일본인 선수만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한편 아이와 선수의 이벤트 대결 등 다양한 마케팅을 전개했다. 최근에는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경기장을 찾는 여성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씨름이나 스모나 어차피 전통이다. 이러한 것들이 화려한 기술의 등장으로 당장 사라지는 구시대의 유물일까? 씨름은 그 변화의 물결에서 탈락해 현재 절치부심을 거듭하고 있으며, 스모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전통 금융업도 마찬가지다. 위기가 찾아왔고 시장이 변했으며 모두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모처럼 본연의 색을 살려 나름의 길을 모색하면 그만이다. 다행히 시간도 있다. 인터넷전문은행의 경우 국내에서는 이제야 태동기며, 산업자본의 금융업 잠식을 걱정하는 정치권의 '후려치기'로 예열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해외에서도 핀테크가 완전히 금융업의 핵심이 아니다.
중금리 대출? 비대면? 기존 금융권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게다가 사업의 초기, 현재 핀테크 업체의 4분의 3가량이 지급결제 분야에 몰두하고 있으나 은행에서 지급결제 부문은 현재 약 7%에 불과하다. 세밀하게 보면 기회가 보인다는 뜻이다.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쫒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는 핀테크를 넘어 모든 영역, 특히 ICT와 빠르게 결합하고 있는 모든 사업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 성격을 가진다. "대리운전업계여, 너희만큼 업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유통업계여, 너희만큼 업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오프라인에서 시작되는 사용자 경험이 핵심이라면 핀테크에 있어 기존 은행도 최소한의 몸집 줄이기에 따른 기회의 포착에 나설 수 있다. 애먼 핀테크 핑계대지 말고, 스모처럼 방향을 잡아라.
최초의 영화 프랑켄슈타인 끝이 어떠했는가. 모두의 죽음으로 결말을 맞지만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전의 재해석이 이뤄지며 결말도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결말은 해석해서 바꾸면 된다. 정해진 결말이라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