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당시에 조선의 금성탕지(金城湯池=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란 뜻으로 매우 견고한 성과 해자)라고 자랑할 만한 평양성까지도 적군에게 내어주고 선조는 영변으로 갔다가 다시 박천으로, 정주로 하여 의주에 도착하였을 때 성안에는 사람이 없었고, 의주 목사 황진, 판관 권황은 달아나고 심지어 닭, 개, 소 짐승들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음! 임금부터 도망 다니는 선수인데, 어느 백성이 성안에 붙어 있었겠는가? 그런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려야 함에도 선조는 교리 이유징으로 의주 목사로 삼고 따라온 조정 신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동헌과 용만관으로 행궁을 삼았고, 멀리 동남으로 있는 서울을 향해 통곡하고 오언시 1수를 지어 중신들에게 보였다.”

 

국사창황일國事蒼黃日 수능이곽충誰能李郭忠 거빈재대계去邠在大計
회복장제공恢復仗諸公 통곡관산월痛哭關山月 상심압수풍傷心鴨水風
조신금일후朝臣今日後 영복갱서동寧復更西東

나라 일로 황급할 때에
누가 이곽 같은 충성을 낼 것인가
서울을 떠남은 큰 계책을 생각해서인데
후일의 회복은 제공을 힘입어야지
관산 달빛에 울음이 절로 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아프구나!
조정의 여러 신하여, 오늘날 이후에도
또다시 서니 동이니 할 것인가

 

“네, 이시는 신하들에게 불만이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군요. 본인의 잘못은 전혀 뉘우치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한편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와 요시토시 등 일본장수들은 수많은 조선인을 매수하여 평양에서 의주에 이르기까지 각 처에 탐정을 늘어놓아 밤낮으로 정보를 수집하여 고니시 등은 연광정에 앉아서도 평양 이북 각 읍의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음! 여기서 조선인들이 적에 가담한 부분이 대단하다. 온통 나라가 적의 손에 백성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일본 놈에게 부역을 한다는 것은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인데도 오늘날에 있어서 일베충, 친일파의 권력을 쥔 자들은 일본을 받들고 있는 것을 볼 때 백두민족의 교육에 큰 문제가 있다.”

“네, 심지어 역사왜곡을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한 일본 놈들과 같이 현실에서도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려고 하였다가 다시 역사를 가르치는데, 친일정권의 입맛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 선생님의 말과 같다고 봅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는 중에 고니시군이 의주에 들이치지 아니하고 시간을 허비하며 지체한 것은 구키 요시다카 등이 거느린 수군을 기다렸다. 만약 명나라의 관문인 의주를 칠 것 같으면 큰 나라가 놀라 움직여 대군이 출동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어서 양국연합군과 싸우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일본도 수륙군이 병진해야 요동을 가히 엿볼 것이나 고니시군 단독으로 의주를 칠 수 없었다.”

“네, 전쟁발발하기 전부터 고니시는 전쟁에 뜻이 없었지만, 히데요시에게 거짓말로 조선과의 교류를 거짓으로 고하다가 잘못되어 전쟁터에 왔기에 고니시는 급하게 전진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진격하려는 것이 역력합니다. 그러할 때 일본의 수군 함대는 경상도 해안에서 이순신장군의 함대에게 연전연패하여 거의 전멸을 당하였습니다.”

“하하! 육전에서 연전연패한 아군이나 해전에서 연전연패한 일본군이나 1:1의 상황이 되었구나! 이런 때에 일본군은 명호옥 본영에서 2차대선 함대를 파견하였다.”

“네, 그런데 고니시는 이순신장군의 존재를 모르고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여 경상도,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완전히 손에 넣어 수륙군이 서로 연합전선을 펼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음! 일본군들은 부산서 의주까지 육로 2천리의 전선을 늘어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해상권을 차지하지 못하고는 도저히 중원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평양에서 웅거한 고니시는 군사를 휴양하며 일본 수군이 이순신장군의 함대를 깨뜨리고 평안도 바다로 돌아오기를 원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네, 평양성의 기습작전에 잠시나마 조선군의 기개를 떨친 임욱경과 도주한 고언백을 비교하는 시를 적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