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왕조의 성립이라는 논리로 볼 때, 당시 권력의 핵을 이루고 있던 노론에게 불리한 일이 왕궁에서 벌어짐으로써 자신들이 내쳐지게 되는 상황에 몰린다면 노론이 그것을 용납할 리가 없다. 왕 하나 제거해서 되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고 판단이 된다면 소위 역성혁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왕조를 바꿔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영조가 왕실보호를 위해서 사도세자에게 가혹한 죽음을 안겼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일단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 속내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이씨 왕조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 자신이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겠다는 극약처방을 내 던질 때에는 나름대로는 적어도 아들인 세자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나면 신하들이 세자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영조의 마음은 그랬다.

1999년 12월 1일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사도세자의 묘지문을 공개했다. 영조가 직접 사도세자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된 것 중에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이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다.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 21일이라.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라고 기록된 부분을 보면 영조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자마자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라고 명시하여 영조자신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얼마나 후회하며 애태웠는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영조는 진심으로 중신들이 사도세자를 풀어주자고 애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세자의 목숨을 거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중신들이 나서서 극구 만류함으로써 왕인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철회하는 절차를 밟기를 원했다.

역사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사도세자의 죽음을 묵인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인륜지사를 보건대, 생모가 아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했다는 것은 추호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살려보려고 영조에게 노론의 반발을 잠재울 겸 세자에게 혹독한 처벌을 내린 후 신하들이 용서를 청원해오면 못이기는 체 사해주기를 간언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영조 역시 자신의 생각과 같은 방향의 이 간언을 받아들여, 세자에게 경각심도 일깨워 주고 노론의 불만도 풀어주는 적당한 선에서 세자에 대한 징벌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세자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하는 등의 극형으로 처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뒤주에 가두었음에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라도 세자를 살리겠다고 나서는 신하가 없었다.

전쟁 중에 적군이 사방을 포위한 상태에서 세자가 화친하러 나오라할 때, 나라의 근본인 세자가 화친하러 갈 수 없는 일이라고 신하들이 막아선 것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과 1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왕과 신하, 세자와 신하 사이에서의 군신의 예는 너무나도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세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건만, 그 어떤 신하도 세자를 죽여서는 안 되고 살려 줘야 한다고 목숨 걸고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는 세자의 장인인 홍봉환마저 침묵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라도 군신의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정치도의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을 영조가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홍봉환은 사도세자의 세자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다. 당장 세자가 죽으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고 자기는 왕의 장인이 되려던 화려한 권세의 꿈을 접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위의 구명에 나서지 못했다. 당시 홍봉한의 벼슬이 영의정과 좌의정을 오가던 삼정승이건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못하고 사위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딸을 과부로 만들고 만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홍봉한은 물론 또 다른 신하들마저 세자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환경을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