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제보 하나 하려고..." 이제는 자주 만나서 취재원이 아닌 형님이 되어버린 그의 말꼬리가 그날 따라 길게 느려집니다. 처음에는 생경스러워 짜증이 났습니다. 우리가 무슨 연애하는 사이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내뱉습니다. "뭐가요?" "아니, 그냥..." 익숙한 말투에 묘한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형님은 담배를 물던 입술에 바짝 힘을 주고는 호흡을 터트리며 중얼거립니다. "판교 게임사 분위기...요즘 아주 험악하다고 해서..."

사실 듣는 순간 무슨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언론 보도를 통해 게임사 직원의 연이은 죽음이 알려지기 전입니다. 형님은 피식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습니다. "무슨 황우석 제보건도 아니고, 뭐 대단한 것은 아닌데 말이야..."

 

진경준 주식 대박 무죄와 판교의 등대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의 폭염이 가시고 거짓말처럼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지금, 갑자기 땀을 뻘벌 흘리며 허탈하게 웃는 형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13일 제 귀에 꽂히는 뉴스가 불현듯 여름날의 생경스러운 제보와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진경준 전 검사장의 주식대박에 대해 법원이 무죄라고 판결했습니다. 김정주 NXC 대표로부터 공짜 주식 등을 받았지만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사실 IT기자로 살면서 검찰 조직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기자 생활 초기 잡다한 영역을 빙글빙글 돌며 허덕일 때 검찰청에서 몇 번 뻗치기해본 것이 전부에요. BBK 사건 당시 김경준 씨가 입국해 검찰에 출석할 때 현장에 있었던 것이 마지막이니 나름 시간도 많이 흘렀네요. 하지만 검사장이라는 직위가 상당히 높은 것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최근 제가 사랑하는 왓챠에서 영화 [부당거래]를 봤는데, 콧대높은 검사 주양(류승범 분)이 부장검사와 말하며 "검사장님도 지켜보고 계셔"라는 대사를 하더군요. 제 경험상 뭔가 고고하게 지켜보는 사람은 대부분 '높으신 분'이더라고요.

실제로 진경준 전 검사장은 엘리트입니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5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2010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제2부 부장검사, 2015년에는 법무부 기획조정실 실장까지 역임했네요.

그 '높으신 분'이 오랜 친구인 김정주 대표로부터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약 9억5000여만원의 주식(이라 쓰고 130억 대박이라 읽는다)과 차량, 여행경비 등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검찰에 기소되었습니다. 옷을 벗는 것은 당연하고,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한 뇌물죄가 적용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최근 법원이 포괄적 뇌물죄 적용에 나서는 분위기인데다 큰 그림에서 보면 이 건은 우병우 전 수석과도 연결되어 최순실 게이트와 접점을 가지는 전 국민적 관심사가 높은 사건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상태에서 특검의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 적용 여부에도 일정정도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죄더군요. 뇌물죄가 인정되기 위한 직무와의 관련성은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답니다. 비록 제3자 뇌물수수 등의 혐의가 인정돼 징역 4년이 선고됐고 검찰은 즉각 항소한다는 방침이지만 왠지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좋습니다.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법원의 판단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낱 기자가 '사적인 사족'을 달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럴 수도 없으며, 필요도, 의미도 없어요.

하지만 분노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오롯이 판교의 등대를 향합니다. 판교에는 야근의 요정이 강림해 노예들이 마법에 홀려 일만 한다는 전설의 등대가 있습니다. 그 등대는 24시간 꺼지지 않고 암흑의 바다를 휘감으며, 비명소리가 커지면 그 푸른 불꽃을 검은 치마속으로 담궈버립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진경준 전 검사장과 판교의 등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니까요. 단지 업계의 내밀한 사정과 대표 회사의 상황이 연결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증오는 더욱 선명하게 향합니다. 누구는 밤을 새우며 피를 토하고 누구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하늘을 꿈꾸다 지상으로 추락합니다. 그러는 사이 하늘위에 사는 누군가는 친구가 건내준 아이템으로 대박을 칩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눈물을 삼킵니다.

물론 증오는 냉정해야 합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판교 게임잔혹사의 배우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자신의 연기를 펼치니까요. 해서는 곤란한 행동을 해버려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 피를 토하거나, 일신상의 이유로 삶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기업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본연의 연기가 펼쳐지는 죽음의 무대는 역시 게임사의 그림자가 배어납니다. 올해 하반기에만 모두 4명이 숨을 다했으며 이들은 모두 개발직군의 20대, 30대 직원들입니다.  연이은 소송. IP에 올인한 일부 게임사의 막무가내 전격전. 경영진의 압박. 여기에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에 따른 생태계 저변의 축소까지.

그래서 진경중 전 검사장의 무죄는, 등대 불꽃에 자신의 몸을 태워버렸던 많은 청춘들을 모욕하는 춤사위에 불과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그래도 된다"는 생각
물론 게임사에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어쩌면 자유롭게 개방스러운 분위기가 어울릴 것 같은 게임사에서 이러한 잔혹동화가 쓰여지고 있다는 점에 더 큰 충격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비극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네, 사실 더 무서운 것을 말하겠습니다. 판교의 등대와 진경준 전 검사장 무죄는 일종의 선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그래도 된다"는 생각의 고착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야 한다"는 사고의 일상화입니다.

대형 게임사도 한 때는 벤처였고, 스타트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장의 과정에서 회사의 진짜 주인이던 직원들의 마음은 공허함으로 채워지고 발전의 역사는 정치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무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이건 스타트업 발전의 역사에도 큰 오점이 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게임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등대로 향하고 있고, 업계는 돌아돌아 다시 제자리입니다. 최근 서울의 모 특성화고를 방문해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며 보았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기억합니다. "게임사에 취업하고 싶어요"라고 웃는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한 게임사 대표가 최근 기자회견을 열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부디, 그 생각이 모두가 생각하는 초심이기를 바랍니다. 만약 어렵다면, 그 학생을 위해서라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