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미국 드라마 <수트(Suits)>에서 결혼을 앞둔 딸이 엄마와 결혼식 준비를 놓고 엄마와 한창 상의 중이다. 로스쿨을 가지 못했지만 하버드 로스쿨을 나왔다고 속이고 변호사로 활동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 딸은, 이 사실이 부모에게 들통날까 싶어서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르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남편은 큰 로펌의 대표이고 사위는 변호사, 딸은 컬럼비아 로스쿨 학생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뉴욕타임스>의 웨딩 섹션에 결혼식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의 웨딩 섹션이 과연 무엇이길래 딸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일까. 일간지 <뉴욕타임스>의 주말판에 나오는 웨딩(Wedding & Announcement) 섹션은 막 결혼한 부부들이 자신의 결혼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공간이다. 한국에서는 일간지에서는 결혼소식란을 찾아볼 수 없지만 동창회보 등의 동정란에서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웨딩 섹션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단순히 누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소위 ‘잘나가는’ 집안의 ‘엄친아’와 ‘엄친딸’이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웨딩 섹션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버드, 예일, 콜롬비아 등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온 신랑, 신부가 등장하고 직업도 의사이거나 변호사, 헤지펀드 매니저, 뉴스 앵커 등 남들의 선망을 받는 직업 일색이다.

막 결혼한 이들 부부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도 간략하게 소개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이들 신랑, 신부의 인적사항과 함께 독특하게도 그들 부모들의 인적사항이 함께 공개된다. 신랑, 신부의 부모들 역시 한가락 하는 사람들로 주로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등 동부의 부유한 동네에 거주하면서 직업은 역시 의사이거나 변호사, 금융전문가 등이 대부분이다. 자녀들과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왔다면 빼먹지 않고 언급하고 박사 학위가 있으면 일반적인 미스터, 미세스 호칭 대신 반드시 닥터 누구누구라고 불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개인적이라서 결혼이 가족 간의 결합이고 부모들의 의견이 중요한 한국과 달리 당사자들의 의견만이 중요하다고 알아왔는데, <뉴욕타임스> 웨딩 섹션을 읽으면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뉴욕타임스> 웨딩 섹션에 결혼을 알리는 것은 미국 부유층의 아이비리그에 대한 열망과 엘리트주의를 나타내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의식에 가까울 만큼 중요한 행사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딸로 아버지보다 더 인기가 있는 이반카 트럼프가 결혼할 때도 <뉴욕타임스> 웨딩 섹션을 통해서 결혼 사실을 공표했다. 이반카가 도널드 트럼프의 딸이라는 사실과 아이비리그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빼먹지 않았다. 또한 남편인 자레드 쿠시너가 <뉴욕 옵저버>의 발행인이라는 사실과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도 물론 포함됐다.

<뉴욕타임스>는 웨딩 섹션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 사람들은 학력과 직업, 부모들의 직업, 자선활동내역, 수상 경력 등을 써내라고 요구한다. 애초부터 명문대학이 아니거나 내로라하는 직업이 아니면 웨딩 섹션에 명함을 내밀지도 못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뉴욕타임스>의 웨딩 섹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시와 함께 비난도 받고 있다.

엘리트주의와 신분주의를 부추긴다는 비난과 함께 종종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백인종 선호에 대한 것이다. 웨딩 섹션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백인이며 간혹 동양인이나 흑인 커플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경력 사항은 다른 백인 커플보다 2~3배 뛰어난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서는 바뀐 사회현상을 반영해 동성결혼 커플도 소개되는데 이 역시도 가뭄에 콩 나듯이어서 실제 미국인이 아닌 상류층 미국인들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유부남과 유부녀가 만나서 이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웨딩 섹션에 이름을 올렸다가, 불륜을 미화한다고 호되게 질책을 받은 적도 있다. 웨딩 섹션의 내용을 패러디해서 올리는 트위터 계정까지 있는 걸 보면, 미국인들의 ‘신분’에 대한 집착은 없는 듯 보일 뿐 특히 부유층에서는 강하게 자리 잡혀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