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튀니지 남동부 지방도시인 시디 부지드 거리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청년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노점상을 했으나, 경찰의 단속에 삶의 기반을 빼앗기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분명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당시만 해도 청년의 죽음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잔인한 말이지만 짧게 튀어 오르는 단발성 불꽃에 불과했다.

그러나 트위터는 달랐다. 청년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트위터를 통해 결집되어어 폭발했고, 여기에 끔찍한 경제불황에 대한 분노와 장기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겹치며 불꽃은 화염이 되었다.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으며, 결국 벤 알리(Zine El-Abidine Ben Ali) 대통령은 2011년 1월 14일 쫒기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고 말았다. 짧았던 아랍의 봄을 끌어낸 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이다.

기술을 넘어 ICT, 세상을 바꾸다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기술로 진화했다. 집단을 이루고 마을을 꾸리며 부족국가를 넘어 왕정국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변곡점에는 줄곧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주로 전쟁을 통한 패러다임의 충돌의 과정에서 두드러진 기술의 발전은 이내 정치 및 사회, 문화, 경제, 심지어 종교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곤 했다. 박이문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를 통해 “인류의 역사는 곧 기술의 역사”라며 “인류 발전의 역사에서 기술의 발달은 단 한 번의 절대적 단절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왔고 축적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은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산업혁명의 질곡을 통과하며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인간의 원초적 힘을 뛰어넘는 기술적 프로세스가 더욱 날카로워지며 무한한 영역의 확장이 벌어졌다. 서세동점의 시대. 서구 제일주의 기반의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린 배경에는 산업혁명의 광기가 분명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1세기, 우리는 스티브 잡스로 대표되는 모바일 혁명의 중심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냉정하게 말해 새로운 시대의 발견이 스티브 잡스 혼자만의 공로는 아니지만, 최소한 아이콘 정도는 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어 하나의 단일한 생활밀착형 플랫폼을 구축하는 시대,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초입에서 그 중간에 서있는 상태다.

▲ 출처=위키미디어

시대를 바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세상을 감동시켰듯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기도 세상을 바꿨다. ‘단 한 번의 단절도 없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갈리지만 그렇게 기술은 세상을 바꾸며 조금씩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전쟁기술의 발전은 대규모 살육을 가능하게 만들어 단일화된 제국의 기틀을 닦았으며 아르키데메스가 발견한 부력은 상업의 발전을,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철학적 가치는 온전히 기술의 사용자 경험이 되어 인간의 부족한 점을 채웠다. 그 연장선상에서 산업혁명의 시작을 매개로 삼은 서구 제국주의 발현도 이해될 수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욕구를 따져보는 시각이다. 기술의 발전이 먼저일까? 아니면 인간의 욕구가 기술의 발전을 부르는 것일까? 장기간 이와 관련된 논쟁이 이어졌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영영 찾지 못할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기술과 욕구는 이제 동등한 수평상태에서 서로에게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최근 벌어지는 초연결, 즉 1인 1PC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가 기술의 발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중요하다. 플랫폼 사업자가 난무하고 모든 것이 연결되는 시대. 빅데이터가 인공지능의 손에서 의미있는 인사이트를 창출하는 시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기술의 하위개념을 ICT로 정의할 경우 가장 눈에 들어오는 변화의 조짐은 단연 SNS다. 왜 SNS일까? 지금까지의 기술이 무언가를 제조하고 창출해 공간적 변화를 끌어내는데 있어 한계를 가졌다면, ICT는 기술의 발전이 통신과 만나 이론적으로 모든 것의 무한한 피드백을 끌어내는 마법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SNS의 가치가 있다. 기술의 발전이 무한의 영역으로 뻗어가는 획기적 패러다임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다양한 SNS는 각자의 취지에 맞게 서로를 연결해 그 객체를 오픈 생태계에 던지거나 폐쇄적 생태계로 가두고 있다. 초기에는 오픈 생태계의 트위터 존재감이 강렬했다. 실제로 아랍의 봄을 끌어냈던 트위터는 2010년대 초반 인상적인 성장을 이루며 각광을 받았고 이는 현실정치재편의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픈 생태계의 만민 민주주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피곤했기 때문에, 최근에는 점차 페이스북같은 폐쇄형 연결 생태계가 더욱 각광을 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정치인들은 세를 모으고 동지를 규합하고 있으며, 촛불집회 참석을 유도하고 설문조사를 한다. 연결의 힘이 가져온 파괴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는 연결 그 이상의 가치에 있어 거대한 의문점을 떨쳐내지 못했다. 쇼핑의 예를 살펴보자. SNS를 통해 쇼핑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의 유도를 이뤄낼 수 있을까? 얼티미터 그룹(Altimeter Group)의 에드 터프닝은 회의적이다. 그는 "소셜 미디어는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공간“이라며 ”기업 입장에서 마케팅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고 단언한다. 이는 SNS 핫딜의 방식으로 초반에만 반짝였던 소셜커머스들이 최근 일제히 오픈마켓의 행렬에 뛰어들거나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분위기를 잘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은 결국 SNS는 소통의 플랫폼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소셜VR과 같은 획기적인 방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실제로 아랍의 봄을 촉발시켰던 트위터의 매력도, 홍콩 우산시위에서 드러난 집단지성도 결과론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현재 중동의 정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중국에서의 홍콩은 여전히 그대로다.

한계, 그리고 한계의 돌파

기술의 하위개념인 ICT가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지만, 시대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인 것일까? 냉정하게 살피면 ‘그럴 수 있다’는 쪽에 의견이 쏠린다. 특히 SNS적 성격만 보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 빅데이터, O2O를 비롯한 다양한 가능성은 어떨까? 아쉽게도 스마트폰 사용자 경험 및 관련 시장의 성장, 앱 생태계 등 손에 걸리는 이슈를 제외하면 ICT적 발전이 거대한 변화를 끌어낸 것은 의외로 몇 년 전 일이다. 그 자체로 대단한 성과이자 변화이지만, 지엽적 이슈로 보면 우리는 스마트폰 이상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으며, 나아가 포스트 플랫폼에 대한 고민만 몇 년 째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디시인사이드의 주식갤러리, 명탕점갤러리의 활약을 살피는 등 지엽적 측면에서의 방향성을 찾아야 할까? 촛불집회의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인원을 파악하는 기술이 세상을 바꿀까? 그런 사례일까?

당연하지만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의 초연결 시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전한 신기술이 아니다. 모바일 혁명이 장기간 축적되어온 인간의 노력에서 폭발했듯이, 초연결 시대도 이미 존재하는 기술적 노하우가 특이점을 넘어서며 발생하는 불꽃의 ‘거대한 화염’에서 시작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만 남는다. ‘ICT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모른다. 하지만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기술의 사명이라면, 그 이상의 발전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가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