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집에 가서 한복을 맞추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한복은 원래 크게 벙벙한 듯 입는 거야.” 당연히 한복집 상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한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복 컨설턴트나 다름없는 역할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복에 대해 특별히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부분이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판매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곧 정의가 된다. 이렇게 한복에 대한 첫 경험을 하는 사람은 판매하는 사람의 말이나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 버린다. 하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한복집 상인들은 한복에 대해서 잘 모른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전통한복’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넉넉한 품, 붕어배래라고 하는 곡선 모양의 형태와 짧은 저고리, 저고리 도련(저고리가 아래쪽으로 끝나는 부분) 바로 아래에서 시작하는 긴 치마. 한복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공식 안내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형태를 ‘전통한복’이라 이른다. 어떤 기사에서는 저고리의 도련 밑으로 치마허리를 보이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는 문구도 곁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긴다. 과연 이 형태 이외의 한복은 전통한복이 ‘아닌’가?

한복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필자가 가장 먼저 깼던 한복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러한 ‘전통한복’에 대한 개념이었다. 한복은 한 가지 형태로만 존재해왔던 것이 아니었다. 의례복, 평상복, 작업복 등의 용도로 우리 생활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입어왔던 한복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시대와 생활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도 달라졌다. 한복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벙벙하고 넉넉하게 옷감을 많이 사용한 형태의 한복은 15~16세기 형태다. 이때는 소매 끝이 길어서 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저고리는 점점 짧아져 19세기를 정점으로 상체에 딱 붙은 형태로까지 변화한다. 치마 모양 또한 지금의 A라인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에서는 몸에서 일자로 떨어지는 H형태의 치마가 18세기에는 동그스름한 미인도형 O자형 치마로, 20세기 들어서는 A라인이 되었다.

우리가 한복의 당연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붕어 배래 형태는 1900년대 전후에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 광복 후 소매 배래와 깃이 더 과장되어 더욱 둥근 형태로 변했고, 당시에는 이를 ‘개량된 형태의 한복’이라고 말했다. 저고리는 그렇다 쳐도 치마허리(말기)가 드러나는 치마를 입을 때, 사람들의 편견은 더욱더 노골적으로 변한다. 흔히 한복업계 상인들은 이를 ‘어우동 치마’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어우동은 조선시대의 성추문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로 왕실의 사람들을 비롯, 많은 남자들과 간통하여 처형됐다. 조선시대를 뒤흔든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인해 어우동은 ‘공공의 적’ 및 ‘부정적 여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는 15세기 후반 즈음 살았던 양반가의 자제였다. 조선 중기부터 여성 저고리의 길이가 점차 짧아지고 허리 말기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우동은 그 이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므로 조선 후기의 극단적인 형태의 한복을 입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기생이나 여종처럼 행동했다는 자료를 확인했지만 입었던 의복 형태는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치마허리가 보이는 말기치마는 기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당시 기생은 의복의 유행을 주도했고 이는 일반 부녀자의 복식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결혼한 남성들도 자신의 부인이나 첩에게 이러한 형태의 복장을 권했다는 사료는 더욱 흥미롭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에는 저고리 밑으로 보이는 하얀 치마허리를 정숙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치마허리(말기)가 보이기만 해도 기생 한복이라며 질겁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위와 같은 학술자료를 찾아 살펴보면 이 또한 ‘전통한복’의 범주에 넣어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 보인다.

이제, 전에 가졌던 편견을 살짝 내려놓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한복을 즐겨보자. 생각보다 더 다양하고 멋진 모습의 ‘전통’한복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