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아들인 자신이 흠 없는 왕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르는 사도세자가 아니었다. 사도세자 역시 어린아이가 아니고 나름대로는 내일의 조선을 통치할 세자로서 그 정도는 이미 알고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끝내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역사는 사도세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735년 음력 1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선이고 어머니는 영빈이씨 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태어난 아들이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었다. 1743년 11월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덕분인지 높은 정치적 안목도 가지고 있어서 탕평책을 내세우던 영조가 파당을 없앨 방법을 묻자 파당을 가릴 것 없이 인재를 등요하면 된다고 답했다고도 한다. 그런 덕분에 1749년(영조 25년)에는 대리청정을 시킬 만큼 영조는 세자를 총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대리청정에서 시작되었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에 관한 업적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대단히 잘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서민들이 부담을 져야 하는 환곡이나 군역에 있어서 일어나는 폐단을 정리하는 방법 중 하나로 군포에 대한 대전이나 방납 등을 금지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일이었다. 자신들의 수입원 중 하나인 부정을 방지한 꼴이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자는 당시 나주벽서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처벌을 확대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을 외면하고 소신껏 처리했다. 당시의 사건이 세자가 보기에는 처벌을 확대할 일도 아니고 더더욱 노론의 의사대로 했다가는 소론의 씨가 말라 노론 일방적인 정국이 될 것임을 세자는 이미 읽고 있었다. 노론으로서는 소론의 씨를 말릴 절호의 기회로 삼고 싶었는데 그야말로 불만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부터 노론은 사사건건 세자를 험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필두에 선 것은 영조보다 51살이 어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를 비롯한 노론이다.

그들은 나경언을 내세워 사도세자의 비행 10가지를 영조에게 고하게 했고, 이 상소를 받은 영조는 너무나도 노한 나머지 사도세자에게 자진할 것을 명했으나 사도세자가 끝내 자진을 하지 않자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둬 8일 만에 죽게 했던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성격이 급하여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처리해야 하는 성격인 반면에 사도세자는 여유가 있는 성격이었다. 모름지기 이것은 영조 자신은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서 형성된 성격일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사도세자는 그런 환란을 겪지 않았으니 세상을 보는 눈도 여유롭고 자연히 모든 것을 급하게 처리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다른 역사는 사도세자에게 결정적인 성격상의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세자 가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사도세자에게는 타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설령 아내인 혜경궁홍씨가 그런 이야기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건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라고 있는 세손인 훗날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일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기록을 접해 볼 때 사도세자가 울화병을 호소했다는 등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영조가 세자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간섭하거나 혹은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