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아버지 숙종처럼 환국정치를 단행함으로써 1727년 정미환국으로 인해서 소론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1728년 즉위4년에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坦)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소론강경파와 남인들이 주동하여 일으킨 무신난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난은 소론 온건파에 의해서 진압이 되었지만 영조로서는 아버지 숙종의 환국정치로는 권력안배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국정치는 피를 부르는 사화의 연속일 뿐이라고 생각한 영조는 환국정치가 아니라 탕평정치를 표방하게 된다.

아버지 숙종처럼 일시에 정권을 바꿔서 권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노론과 소론을 동시에 균형 있게 등용하고 또 벌을 줄때도 균형 있게 처벌한다는 것이다. 노론으로 영의정을 삼으면 소론으로 좌의정을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판서에 노론을 등용하면 참판과 참의를 소론에게 맡기는 방식이었다. 또한 죄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의 죄만 묻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의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등용도 치죄도 양쪽 모두에게 적용함으로써 편파성을 극복하고 양쪽 모두 벼슬길에 나와 함께 정치를 하게 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실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탕평책을 내세운 영조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즉위하게 만든 노론의 인사들이 역적으로 몰렸던 신임사화를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다. 결국 1740년(영조 16)에 신임사화 당시 역적으로 몰려 처벌되었던 사람들을 신원해 줌으로써 즉위 15년 만에 노론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것은 영조 자신도 신임사화 당시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방법 중 하나였으며, 그로 인해서 경종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항간의 모든 의혹을 씻을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영조는 신임사화가 소론 과격파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발표하고 그 때 희생된 이들을 신원함으로써 신임사화를 매듭 짓는 경신처분을 내리고, 이듬해에 이 처분을 정리해서 신유대훈을 반포하고, 이런 사실을 종묘에 고함으로써 15년 만에 자신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확립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소론은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위축된 소론의 불만들은 나주에서 객사에 벽서를 붙이고 민심을 동요하여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소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바야흐로 노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소론의 몰락과 함께 영조는 대탕평의 기치를 걸고 채제공 등의 남인과 북인까지 끌어 들이지만 대탕평이라고 보기에는 노론정권을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는 것이 옳은 견해일 것이다. 영조가 신유대훈을 종묘에 고하던 날인 영조실록 17년(1741) 10월 1일 1번째 기사에 기록된 대로 "사람을 등용하는데 있어 반드시 호대(互對)로 할 필요는 없으니, 만일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비록 한편의 사람을 백 번 들어 쓴다 하더라도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함으로써, 인재 등용을 능력에 의해서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노론의 권력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권력을 장악한 노론에 의해서 정권은 무난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용한 흐름 속에서 조선 역사 중 궁중에서 일어난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영조는 자신이 15년 만에 왕권의 정당성을 종묘에 고하기는 했다지만, 늘 자신이 즉위한 것의 정당성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고 그로인해서 반역의 음모가 자주 있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렇기에 세자만은 흠 없는 왕으로 즉위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아버지가 환국정치를 했고 자신은 탕평책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양반⦁사대부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더 이상은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권력의 전면에 서면 권력을 잃은 다른 한쪽은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다시 권력의 전면에 서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그 중 가장 좋은 것이 왕을 갈아 치움으로써 그 왕으로부터 권력을 독차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숙종은 환국정치를 통해서 적당한 시기에 권력이 남인과 서인 사이를 옮겨 다니게 했고, 자신은 탕평책을 내세워 노론과 소론 세력 간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그러나 양반⦁사대부들에게 반역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했기에 더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