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저의가 무엇이든 간에, 정유 독대를 하는 자리에서 숙종은 노론에게 화경숙빈 최씨의 아들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명빈 박씨 소생의 연령군을 부탁했으며, 연잉군보다는 연령군을 더욱 총애했으나 연령군은 숙종이 죽기 전해인 1719년에 죽었음으로 노론은 연잉군을 숙종의 후계로 삼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숙종이 연잉군보다 연령군을 더 총애했음에도 노론이 연잉군을 지지한 이유가 연령군이 숙종보다 먼저 죽었다는 이유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연령군이 죽은 것이 정유독대 2년 후인 데다가, 연잉군은 1699년(숙종 25) 연잉군에 봉해졌으나 어머니가 무수리라는 미천한 신분이었던 관계로 또 다른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빈 김씨는 노론의 세력가인 김창집의 종질녀이다 보니 연잉군은 당연히 노론의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경종을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숙종이 세자교체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지만 죽을 때까지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리청정을 하던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미 숙종이 지핀 불씨는 사그러들줄을 몰랐다.

1720년 6월 8일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 때 경종의 나이가 33세에 불과했으나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왕세제를 책봉해야 한다고 노론이 들고 일어났다.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왕의 후계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불과 나이33살의 왕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세제를 삼아야 한다는 것도 사실 왕권이 얼마나 나약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노론의 성화에 경종은 결국 후계자를 정하게 되는데, 당시 소론과 경종의 비 선의왕후가 다른 후계자를 물색하던 중에 그 당시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인원왕후가 숙종이 남긴 유지라고 하면서 삼종혈맥(三宗血脈)논리를 들고 나온다. 삼종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이 조건에 해당하는 왕손은 임금인 경종과 연잉군밖에 없으니 당연히 연잉군이 세자로 책봉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자로 책봉된 연잉군은 신임사화로 인하여 자신의 왕세제라는 작호를 거두어달라고 대비에게 간청할 정도의 커다란 분수령을 겪는다.

신임사화는 2년(경종1~2년)에 걸쳐 이루어진 사화로 이른바 목호령의 고변 사건이라고도 한다. 남인출신의 서얼인 목호룡이 노론의 고위층에서 경종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고변함으로써 무려 170여명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간 사건이다. 노론의 몰락과 소론의 정권장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로서는 목숨마저 위협받을 처지에 놓였던 사건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론 강경파들이 왕세제 역시 관련설이 있으니 책임을 물어서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경종이 형제의 의리를 지켜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큰 분수령을 넘은 영조는 경종이 즉위 4년만인 1724년에 목숨을 거두자 왕위를 계승한다. 물론 경종의 죽음 자체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독살이라는 설이 파다했으며 그 죽음에는 영조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영조는 왕위에 오르고 자신이 연잉군 시절부터 왕세제로 있으면서 겪은 일들을 잊지 않고, 아버지인 숙종이 그랬던 것처럼 붕당간의 권력균형을 세움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한다. 나이 서른을 먹도록 보아온 것이 붕당간의 권력싸움이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왕권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왕권은 물론 왕조의 존망마저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을 지지했던 노론을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수립하여, 자신을 지지하다가 죽음을 당한 신임사화의 희생자들을 신원해 주기도 했으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소론을 제거하여 보복하겠다고 나서는 노론으로부터 권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노론을 일시에 축출하고 소론정권을 형성하는 정미환국을 단행한다. 아버지 숙종처럼 환국정치를 단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