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숙종이 앞을 내다 볼 수 없도록 행동했던 점들을 눈여겨보면 이것은 숙종이 장옥정을 총애한다는 것을 빌미로 그의 오라비인 장희재를 등에 업은 남인들이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숙종의 반란이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 것이다. 양반·사대부들이 왕권을 무시하며 날뛰던 당시의 상황에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장희빈과 인현왕후사이에서 애증으로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의 애증의 변화가 두 여인을 추종하는 세력에 대한 권력의 향배를 가늠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두 여인에 대한 숙종의 애증의 관계보다는 권력의 향배를 남인과 서인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들 수밖에 없던 당시의 왕권이라는 것이다. 왕권이라고 하면 절대적인 것으로 오인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양반 사대부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왕도 갈아치우는 것이 당시 양반·사대부들이 휘두르던 권력의 칼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왕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아니다.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력의 틀을 왕이 건드릴 때 왕권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당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결국 왕이 할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양반·사대부들의 눈치를 보면서 권좌유지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정말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일지언정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펴거나 법을 반포하면 무슨 명목을 대던 왕도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명목을 내세워서 목숨을 걸고 라도 반정을 일으켜 왕을 갈아치우려고 했던 자들이 바로 양반·사대부들이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반정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 일개 당파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자신들의 권력을 내세우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으니 어쩌면 반정까지는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왕들의 수명을 살펴보면 제명에 죽은 왕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 쉽게 해결책이 나오는 일이다. 조정의 각 부처는 물론 왕의 건강을 살피는 어의들까지 그들의 손 안에서 놀아났으니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군사부일체라는 유학의 이념을 앞세워 집권하던 것을 본다면, 당시 양반이라는 자들은 스승은 물론 부모 역시 형식상으로만 존경하고 남들의 눈앞에서만 효도하는 척 하는 전시효과를 위한 물품 취급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마저 자아내게 하는 대목들이다.

숙종이 남인과 서인 사이를 오가면서 권력의 향배를 적당하게 조절해야 했던 이유들이 바로 이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세인들의 눈에는 여인들에 대한 애증으로 비춰졌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애증의 관계와 권력을 이용한 환국정치의 과정을 겪으면서 산출된 이론이 숙종으로 하여금 세자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세자의 잘못된 점을 꼬집어서 폐해야 한다는 공개적이고 합당한 방법이 아니라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인 좌의정 이이명과 1717년(숙종 43)의 정유독대에 의하여 노론과 정치적 결탁을 단행함으로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정말 숙종이 세자교체를 원한 것인지는 한 번 쯤은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만일 숙종이 왕세자를 교체하는 것에 확실한 의지가 있었다면 무려 3년이라는 세월동안 그 문제가 공전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역시 숙종이 권력의 향배를 짐작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던져 놓은 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왜냐하면 숙종이 던져놓은 이 문제로 인해서,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옥정이 중전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희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남인을 상대하며 서로 의기투합했던 노론과 소론이, 남인이 몰락하자 다시 강경하게 대립하여 소론은 훗날 경종이 되는 왕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훗날 영조로 즉위하는 연잉군을 지지하여 경쟁하게 된다. 남인과 서인 사이에서 그럴듯하게 권력을 조절하였던 숙종으로서는 남인이 몰락한 후에 노론과 소론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