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25년 만에 타결됐다. 하지만 여전히 한·일 위안부 협상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와 국제단체의 협상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행사가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배상한다며 일본이 지불한 10억 엔이 배상금이 아닌 단순 거출금인지에 대한 논란, 협상 과정 전에 피해자인 할머니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했는데 단순 명절인사 외에 정부 차원의 의견 청취 및 지역 방문은 없었다. 무엇보다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의 욕구는 거액을 보상받는 것보다 일본의 공식적 사죄다. 기자들 앞에서 폼 잡고 하는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사죄해야 했다. 진정성을 다해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게 할머니들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다.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협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문제만 키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정부는 왜 이런 협상을 해야 했을까? 이스라엘의 학자인 바 엘리는 축구경기에서 패널티킥을 차는 선수들을 관찰했다. 그 결과 선수들은 3분의 1은 공을 골대의 중앙으로 차고, 3분의 1은 오른쪽으로, 3분의 1은 왼쪽으로 찬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골키퍼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안타깝게도 그들 중 2분의 1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고, 나머지 2분의 1은 왼쪽으로 몸을 날린다. 모든 공의 3분의 1은 중앙으로 날아온다는 분석결과가 있음에도 말이다.

골키퍼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그 이유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심적으로 괴롭기 때문이다. 뭐라도 해야 다른 선수들이나 팬들에게 야유를 덜 받기 때문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야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가 남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도 행동을 해야 되는 이런 인간의 심리를 ‘행동 편향(Action bias)’이라고 한다.

정부가 실효성 있는 성과를 가져 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위한부 협상을 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는 행동 편향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협상타결 후 어떤 정부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 언론화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는 왜 행동 편향에 권리를 빼앗기는 걸까? 진화의 역사관에서 보면 사냥꾼이나 채집가들이 살던 환경에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훨씬 많은 보상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빠른 반응과 행동이 매우 중요했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서 전략을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의 패턴을 후손인 인간이 이어받아 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불분명한 상황에서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충동을 느낀다.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위안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면 문제는 다르다. 당사자들의 보상을 위해서, 그들만의 위안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상황이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나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충고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방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 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