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 게이트’ 파문으로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졌다. 최순실 게이트로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대학가와 노동계, 장애인, 의료계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고, 급기야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 열리기도 했다. 하물며 중·고등학생까지 나서서 최순실 게이트의 진실을 요구했다.

 

기원전 1세기,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 온 탈무드에 위대한 현자인 랍비 힐렌이 등장한다. 힐렌은 이렇게 묻는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그러나 반대로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즉, 5천만 대한민국의 안위와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맞바꾼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닌 악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최순실은 악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커다란 고통보다 자신의 작은 고통에 더욱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 사람들의 아픔은 인정해, 하지만 내 코가 석자야.’ 라고. 네팔 지진 전에 국내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 때도 자신의 일과 무관한 사람은 ‘적당히 하지’라며 자신의 이기심만 내세웠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고 해도 기본 바탕위에는 선함이 있다. 악마 최순실도 자기 딸만은 손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인간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의 운명과 처지에도 관심을 가진다. 나아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기도 한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은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와 닮은 사람이 19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장발장 입장에서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보통의 경우 천운이라고 생각하고 최순실처럼 더한 악행을 저지르는데 장발장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는 자유의 몸이지만 자신을 대신해 고통받는 사람을 생각하며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지? 그래,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그렇다고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고뇌 속에 장발장은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결국 자수를 선택한다. 자신만 입 다물면 감옥살이 할 필요없이 떳떳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장발장은 왜 이런 판단을 했을까? 우리 인간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는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 지지, 반감, 갈등을 경험하면서 만들어진다.

이렇듯 사람들은 타인의 반응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도덕적 관찰자’를 두게 된다. ‘도덕적 관찰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강력한 자기 수양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진정 자신은 누구인지,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를 고뇌한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도덕적 관찰자’가 있다. 산에 올랐을 때 빈 음료병을 그 자리에서 버리지 않고 하산 후 재활용 휴지통에 버리게 해주는 가상의 인물이다. ‘도덕적 관찰자’ 덕분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최순실은 없고 장발장은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최순실은 자신이 정한 최소한 양심만 갖고 있고 장발장은 강력한 자기 수양인 ‘도덕적 관찰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최순실은 장발장 보다 못한 존재다. 따라서 그녀가 악마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