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자신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선명하게 하려 했던 이유는 여럿이지만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그의 직전 왕이 바로 경종이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이자 경종의 동생이다. 직전 왕의 아들이었다면 즉위 과정에서 어떤 불협화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후궁의 아들도 중전에게 후사가 없으면 왕이 될 수 있고, 왕의 후손이 없으면 동생도 왕이 될 수 있던 것이 조선의 왕계다. 그러나 영조의 경우에는 그 경우가 좀 별났다. 직전 왕의 동생이라지만 같은 어미의 배에서 태어난 것도 아닐뿐더러, 신분이 분명치도 않은 무수리 출신의 후궁인 어머니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이다. 이름 있는 가문에서 선발되어 들어온 후궁의 자식도 아니기에 외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은 나약하고 병치레를 하느라고 후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자체가 독살이라는, 그것도 영조가 직접 관여됐다는 의문에 쌓인 채 죽은 왕이다. 경종의 죽음은 영조4년에 무신난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니, 직전 왕의 동생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독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특별히 밀실 정치가 이루어진 이유는 바로 그런 배경에서 기인했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얽힌 애증의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희빈은 본명인 장옥정이라는 이름보다 희빈이라는 칭호가 뒤에 붙어서 더 잘 알려진 여인이다. 빈은 조선시대 후궁에게 부여하던 관작으로, 후궁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위인 정 1품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 듯한 권세 속에서 살았을 것 같은데, 그녀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으로, 극에서 극을 오간 삶을 살았다. 역관의 딸로 태어나 일개 궁녀의 신분에서 중전마마의 호칭을 얻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결국에는 숙종의 명에 의해서 자진했다고도 하고, 자진하라는 명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지 않는 까닭에 사사 당했다는 설도 있는 비운의 여인이다. 그 덕분에 당대와 인접한 후대에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인현왕후전’이라는 소설과 ‘수문록’ 등을 탄생시켰고, 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힐만하면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인이다.

장옥정은 숙종보다 2년 연상인 여인으로,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여인들처럼 그렇게 미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조실록에 의해서 미인이었다는 짐작을 해 볼 수는 있다. 숙종실록 12년(1686) 9월 13일 1번째 기사로 대사헌 김창협의 상소내용 중 장옥정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후궁으로서 가까이 사랑할 사람이 간혹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실로 관어를 순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종사의 경사가 있게 하고 미색(美色)에 마음이 현혹될 근심과 치우치게 사랑에 빠져 은총을 열어 준다는 비난을 없게 한다면”이라고 쓴 것을 본다면 장옥정이 미인이고 숙종의 사랑을 눈에 띄게 받았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장옥정이 숙종의 사랑을 받았던 진짜 이유는 후손이 없던 그에게 훗날 경종이 되는 후손을 생산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1688년 당시 내명부 정2품의 신분인 소의이던 장옥정은 10월 28일 숙종이 그토록 고대하던 장남 ‘균(昀)’을 낳았다. 그가 훗날의 경종이다. 숙종이 1661년생이니 28세의 젊은 나이에 손을 얻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숙종은 1667년(현종8)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에 현종이 죽자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미 세자시절인 1671년에 인경왕후와 혼인해서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리고 인경왕후는 1680년(숙종6)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1681년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 역시 후사를 잇지 못하던 중에 장옥정이 왕자를 생산한 것이다. 비록 왕자를 생산해 준 여인은 다르지만 첫 결혼으로부터 무려 17년만의 일이요, 즉위한지 14년만의 일이니 가히 경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