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수 이원 대표 (출처=이원코리아)

시계는 현대인에게 필수품이다. 시간은 가장 대중적인 척도이자 단위다. 대인관계나 비즈니스, 공공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요긴하게 활용된다. 시각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시계는 누구에게나 필수품이다.

김형수 대표는 지난 2012년 33살의 나이로 이원을 창업했다. 이원은 국내외 시장에서 매달 2000여개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시계 제조사다. 이원의 시계 ‘브래들리’는 조금 특별하다. 비장애인뿐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멋있는 제품’이란 슬로건은 이 회사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명확히 대변하고 있다. 사업가로서 그의 첫걸음은 편견을 깨트리는 데서 시작됐다.

 

시끄럽고 투박한 시각장애인용 시계

김 대표는 국내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미국에서 심리학 학·석사와 신경과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언론사 기획팀, 금융컨설팅 등의 경력을 쌓고 지난 2010년 MIT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경영대학원생 시절 하루는 시각장애인 친구가 수업 중 그에게 시간을 계속 물어왔다. 친구가 차고 있던 디지털시계는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음성 메시지로 시간을 안내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수업시간에 떠들썩한 음성 알림은 적합하지 않았다. 디자인마저 투박했다고 김 대표는 회상했다.

이어 “우리(사람들)는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각장애인도 생활 필수품 사용에 불편이 없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며 “심지어 시계 같은 기본적인 물건 하나 괜찮은 게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시장조사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골동품점에서 여러 제품을 구매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최근 출시된 소비재들이 터치스크린 패널을 쓰고 있는 까닭이다. 촉각에 의지하는 시각장애인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버튼이나 노브 형태의 손잡이가 달린 구식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같은 제품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김 대표가 처음 고안한 디자인은 점자시계였다. 매 분마다 바뀌는 점자 디스플레이를 손으로 만져 시간을 확인하는 콘셉트였다. 엔지니어들을 모아 3~4개월간 작업에 매진했다. 그 결과 시제품을 완성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각장애인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후기를 듣기 시작했다. 반응은 싸늘했다.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0명 중 1~2명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김 대표에게 쏟아졌다.

그는 “(시제품을 사용한 시각장애인들이) 크기나 색상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은 당시 가장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며 “기능적으로 우수하면 그분(시각장애인)들이 환영할 거라고 오판했던 거죠”라고 말했다. 장애인들이 원하는 제품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경계 짓지 않는 시계였다. 착용해도 남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주문했다.

김 대표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장애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합니다”며 “시각장애인은 디자인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후 디자인 작업에 시각장애인을 참여시켜 상품을 개선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이 ‘브래들리’다. 이원(Eone)은 ‘Everyone’의 준말이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브래들리는 시침과 분침이 없다. 대신 구슬을 손으로 만져 시간을 알 수 있다. 티타늄 바디와 메쉬 스트랩으로 세련된 느낌을 연출했다. 와치(Watch)와 타임피스(Timepiece) 모두 시계를 지칭한다. 이원은 브래들리를 와치가 아닌 타임피스로 정의한다. 타임피스는 볼 수 없는 사람도, 볼 수 있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 전용 제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 대표는 비장애인 소비자도 시간을 만지면서 시각장애인의 삶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원의 역발상 접근법은 흥미롭다. 대부분 산업군에서 ‘디지털’을 앞세우고 있는 현재, 이원은 아날로그에 초점을 맞췄다. 디지털시계에는 많은 기능들을 담을 수가 있다. 하지만 시각에 의존해야 하고 유행에 민감하다는 단점이 있다. 김 대표는 기능뿐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서도 아날로그가 브래들리가 내세우는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브래들리는 비장애인 소비자 사이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김 대표는 주요 원인으로 디자인을 꼽았다. “좋은 디자인에는 사용을 편리하게 해주는 기능적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또 독특해야 하죠”라면서 “요즘에는 미학적으로 아주 특별하고 남달라서 특정 계층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멋진’ 디자인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라고 전했다.

▲ 출처=이원코리아

“이원과 유사한 브랜드가 등장하기 바란다”

더불어 “이원이 생각하는 이보다 더 좋은 디자인이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라며 “다른 이로부터 공통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고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디자인이 비시각장애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낸 것 같습니다”라고 밝혔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장애인은 ‘포기’와 ‘불편’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부 시각도 있다.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와 기술이 보급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이에 변화가 시급하다는 의견과 ‘이 정도면 됐지’라는 태도가 공존한다.

‘이 정도면 됐지.’ 김 대표도 사업 초기 주변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사회활동이 활발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며 “시각장애인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기에는 장애의 벽이 너무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또 “이 같은 생각은 시각장애인을 무조건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라고 꼬집었다. 김 대표는 배려가 필요한 대상으로 대하는 것과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다. 후자는 시각장애인의 자존감과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부연이다.

이원의 목표는 특정 매출 달성하거나 직원 수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오는 2020년까지 각기 다른 콘셉트 디자인을 3개 선보일 계획이다. 향후 2~3년간은 브래들리에 집중할 방침이다.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차기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시각 장애인뿐 아니라 다른 신체 장애인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는 디자인을 목표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이원뿐 아니라 유사한 콘셉트의 브랜드가 등장하길 바랍니다. 경쟁상대여도 좋습니다”라며 “더 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이 이원의 비전에 공감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