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앞마당에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흐르며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랐지만 앞마당에 모인 2000여명의 삼성전자 직원들의 표정에는 참담함과 비통함, 그리고 지나간 겨울의 차가움이 얼음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정성품질 고객만족'이라는 띠를 두르지 않았다면 벼랑 끝에 몰린 노동조합의 집회라고 말해도 믿을 지경이다.

신호가 떨어지자 앞마당에는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와 키폰들이 산처럼 쌓였다. 직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누군가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빚어낸 자식과도 같은 기기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관료주의의 악습에 절어 대충대충 퉁쳐버린 눈 먼 돈벌이다.

마치 전쟁에서 패배해 죽은 병사들의 시체처럼 쌓아올려진 삼성전자의 제품들. 어디선가 불도저가 나타나 15만대에 달하는 기기들을 산산조각냈고 처참한 속살을 드러낸 시체들에는 뜨거운 화염이 휘감겼다. 500억 원에 달하는 삼성의 악습은 그렇게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스며들었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갤럭시노트7, 고개 숙인 삼성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 단종이라는 초유의 선택을 하자 업계는 충격과 공포에 휘말렸다. 갤럭시노트7에 부품을 제공하는 전자 계열사인 삼성전기와 삼성디스플레이는 크게 비틀거렸고 협력사들은 생존을 걱정하는 지경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3조원 중반에 달하는 직접적인 손실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에 따른 무형의 브랜드 가치 훼손액은 계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냉정하게 말해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7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갤럭시노트7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조급함이 키워드다.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7을 빠르게 출시해 하반기 프리미엄 시장을 조기에 선점하려고 했으며 이는 지극히 경쟁자인 애플 아이폰7만을 의식한 오만이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일정이 주어지자 개발자들은 제품을 완벽하게 검증하지 못했으며, 마케킹 부서는 지나친 욕심만 부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부서별 경쟁, "제품이 나오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갤럭시노트7이 나오면 고객들은 알아서 선택할 것"이라는 안일한 마인드까지 겹치며 비극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애자일까지 동원하며 나름의 조직 문화를 고치려고 했으나 이 역시 부작용이 더 컸다는 주장이 나온다. 껍데기에 불과한 기이한 조직 문화에 천착해 진짜 중요한 소통의 방식을 상실한 삼성전자에게 최강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사치였다.

결론적으로 기기의 삼성, 제품의 삼성이라는 구호는 허상이 되었으며 그저 기기를 빠르게 출시해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자위만 거듭했다. 각 부서는 개별적으로 놀았고 소통은 없었다는 자성이 나오는 이유다.

갤럭시노트7 논란이 불거진 후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최초 배터리 문제로 가닥을 잡았으나 신제품마저 발화에 휘말리며 고동진 사장의 진심어린 사과와 리콜 선언도 그 순수함이 퇴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대로 된 원인도 규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만 낭비했고 갤럭시노트7을 구매한 고객들은 구매, 안전도 검사, 리콜, 교환이라는 번거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고통의 언덕, 넘겠다"
현재 삼성전자는 3월 잠정실적을 수정하며 '매도 먼저 맞자'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12일 발표한 실적을 보면 올해 3분기 삼성전자의 수정된 잠정실적은 연결기준으로 매출 47조원, 영업이익 5조2000억 원이며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9.06%, 영업이익은 29.63% 감소했다. 전분기 대비로는 매출 7.73%, 영업이익 36.12% 감소한 수치다. 이에 앞서 삼성전자는 7일 올해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하며 영업이익 7조8000억 원, 매출액 49조 원을 거뒀다고 전했다.

또 13일 갤럭시노트7의 교환·환불을 진행하는 모든 고객에게 3만원 상당의 삼성전자 모바일 이벤트몰 이용 쿠폰을 증정하기로 했다. 더불어 11월 30일까지 갤럭시노트7을 '갤럭시 S7 엣지', 'S7', '노트5'로 교환하는 고객에게 통신 관련 비용 7만원을 추가로 지급할 예정이다. 신제품을 교환하면 10만 원을 준다는 뜻이다. 갤럭시노트7 여파에 따른 후폭풍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갤럭시 생태계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통렬한 반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3월 발표된 스타트업 삼성을 기점으로 제2의 출발을 다짐한다는 말이 나온다.

고 사장의 이메일에 단서가 있다. 고 사장은 12일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사업부 최대의 위기 상황을 맞아 신속하고 용기 있게 정면 돌파해왔다"며 "정밀한 검사를 진행해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고객을 위한 최선의 조처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상당한 규모의 경영 손실을 차치하고라도 지난 몇 주간 진행 상황과 오늘의 결정(단종)이 임직원 여러분께 드릴 마음의 상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저 또한 사업부장으로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런데도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를 주시는 임직원 여러분께 마음 깊이 죄송한 마음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며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끝까지 (원인을) 밝혀내 품질에 대한 자존심과 신뢰를 되찾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부족한 지점에 대한 반성과 자숙,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다짐한 셈이다.

내부에서도 이번 갤럭시노트7 논란을 위기로 규정하고 고통의 언덕을 함께 넘어가야 한다는 다짐들이 쏟아지는 것으로 확인된다. 조급증, 안일한 생각, 미래를 향한 비전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다. 더불어 작업 공정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통해 미래를 도모한다는 방침이다.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을 통해 당장 무너질리는 없지만, 사실상 괴멸적인 피해를 입을 전망이다. 조직 문화를 새롭게 가꾸고 무너진 유통망 관리도 손봐야 하며 부품 내재화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풀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짐이다. 1995년 화형식을 통해 위기를 공유하고 타개했던 당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나름의 역할을 해줘야 하는 순간이며, 참담함을 곱씹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