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거울삼아서 잘못 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잘했던 일은 더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조선 궁중에서 일어난 사건 중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현재 우리의 삶과는 무슨 연관이 있으며,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조선 500년 역사 중 궁중에서 일어난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 그것도 뒤주에 가둔 후 땡볕에 놓아두고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채 굶겨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아비가 아들을 고통 속에서 굶겨 죽인 조선 최악의 비극 사건이라는 평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막 되어먹은 집안이라도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다. 자식이 아무리 패륜을 저지르고 아비에게 폭행을 가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덮으며 감싸고 언젠가는 개과천선할 날을 기다리면서 묵묵히 그 고통을 참아 내곤 한다. 창조주로부터 사고하는 것과 인내하는 것을 특별한 선물로 부여받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이하면서도 선택받은 선물이다. 자식을 사랑하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말로 이 세상에 용서라는 단어가 존재하게 하는 표상인 까닭이다.

그런데 신분으로 말하면 조선 최고로 감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고, 학식이나 권력이나 재력이나 그 무엇으로도 조선의 그 누구도 당할 수가 없는 왕실에서 아비가 자식을 죽인 것이다. 그것도 고통 중에 죽어가는 모습을 아비는 나 몰라라 하는, 그야말로 금수만도 못한 짓을 벌인 것이다. 금수도 자식이 커서 독립하기 전에 품에 안고 있을 때에는 죽이지 않건만 인간이, 그것도 온 나라가 하늘처럼 우러르는 지존인 상감이 제 자식을 고통이 극에 달해서 죽도록 처참하게 만든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동정심이 절대 우러러 나올 수 없는 행위였다.

만일 영조가 사도세자의 잘못된 점을 적나라하게 알리고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를 함으로써 고통 없이 죽게 했을지라도 자식이 아비를 죽였다는 지탄을 면키 힘들었을 것이다. 정 마음에 안 들면 세자를 폐하고 궁에서 내치고 멀리 제주도 같은 곳으로 유배를 보내면 되지 굳이 죽일 이유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입을 모았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아비를 죽이려고 난동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미에게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닌데 죽음까지 당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는 아들이 고통 중에 죽어가는 꼴을 즐긴 것처럼 비춰졌다. 모름지기 영조는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그 비난을 면한다는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왕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왕권보호라고 하면 우선은 영조 자신의 왕권이 될 수도 있다.

영조의 즉위는 조선의 여느 왕과는 그 차이를 보인다. 조선의 왕치고 순탄하게 즉위한 이를 꼽는 것이 불화와 문제를 안고 즉위한 왕을 꼽는 것에 비해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조의 즉위는 특히 심했다. 세자로 책봉된 자체가 밀실정치와 계파정치에 의한 산물이었으며 노론이라는 파당을 등에 업고 이루어진 왕권이기에, 영조의 왕권이야말로 언제 무너질 줄 모르는 왕권이었다. 탕평책이라는 것을 앞세워 자신의 왕위 계승이 정통하다는 것을 규명하고 종묘에 고하는데만도 무려 15년이나 걸린 왕이다. 결국에는 자신이 즉위하도록 만들어준 노론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데에도 노론과 소론의 손을 번갈아 들어주면서 15년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왜 이렇게 긴 세월동안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데 공을 들여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