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서 매년 NDC라는 행사가 열린다. 넥슨이 진행하는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다. 2015년 NDC는 오웬 마호니 넥슨 대표 환영사로 시작됐다. 그는 1980년대를 회상하며 그때와 지금을 비교했다. “지금 게임 업계에는 과거 ‘아타리 쇼크’ 때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타리 쇼크는 게임 업계 최악의 악몽이자 흑역사로 기억된다. 그러니 마호니 대표는 현재의 위기를 강조하고 싶었던 셈이다. 그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상업적인 성공에만 집중하면 게임의 질은 점점 떨어집니다.”

 

만들면 팔리던 그때 그 시절

업계에서 ‘제2의 아타리 쇼크’ 같은 표현은 널리 사용해왔다. 다가오는 위기를 예견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다. 위기의식이 짙어질수록 이런 표현은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다. 악몽 같은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다신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에서다.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타리 쇼크는 수차례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충격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1970년대로 기억을 되감아야 한다. 당시 미국 게임 시장 최대 화두는 가정용 게임기였다. 가정용 게임기 시대가 열리면서 업계에 활기가 돌았다. 새로운 플랫폼은 새로운 수익원이나 다름없었다.

아타리는 1977년에 가정용 게임기를 선보였다. 아타리 VCS가 그것이다. 나중엔 아타리 2600이라고 이름이 바뀐 게이밍 플랫폼이다. 기존 게임기가 본체 안에 게임이 내장된 형태라면 아타리 VCS는 게임팩을 끼워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게이머는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이 지겨워도 괜찮았다. 다른 신작 게임팩을 구입해 즐기면 되니까.

아타리 VCS가 출시되자마자 메가 히트 게임기가 된 것은 아니다. 그 시절 너무 많은 게임기와 게임이 시중에 나와 있었다. 게임사들은 무한 경쟁에 시달렸지만 게이머는 나쁠 것이 없었다. 재미있는 것만 잘 골라서 즐기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타리의 황금기는 1980년대와 함께 찾아왔다.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남아있는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 흥행이 기점이었다. 인기와 함께 아타리는 폭발적 성장기를 맞게 된다. 전체 게임 시장 규모도 빠른 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아타리는 그다지 신중할 필요가 없었다. 게임팩을 출시하면 기본 수십만장은 족히 팔려나간 탓이다. 한 예로 오락실 인기 게임 ‘팩맨’ 라이선스를 구입해 아타리 VCS에 이식한 게임은 700만장이 팔려나갔다. 오락실에서 즐기던 팩맨과 비교하면 게임성이 한참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긴 했지만. 아타리는 자신감 넘치게 이 게임 저 게임을 마구 쏟아냈다.

▲ 출처=위키미디어

아타리 쇼크의 유령은 되살아날까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아타리 쇼크가 찾아왔다. 백과사전은 아타리 쇼크를 ‘1983년 판매 경쟁의 과열로 북미 비디오 게임 업계의 수익률이 대폭 하락한 위기 사태’로 요약 설명한다.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정리다.

믿기지 않는 호황에 아타리는 물론 많은 이들이 아타리 VCS 플랫폼에 들러붙어 게임을 양산했다. 게임만 찍어내면 돈이 벌린다는 소문에 게임과 무관한 회사들까지 시장에 뛰어들었다. 캐릭터 회사, 식품 회사, 음반 회사 등이 엉뚱하게도 게임 사업을 추진했다. 망조였다.

아타리는 라이선스에 민감했지만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뜻밖의 서드파티가 득실거렸다. 돈에 눈이 멀어버린 회사가 만든 게임은 뻔했다. 카피캣에 불과했거나 지나치게 질이 낮았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저질 게임이 쏟아지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정용 게임기에서 신세계를 맛본 게이머들은 처음엔 게임성에 관대했다. 완성도와 상관없이 신작 게임팩을 사들였다. 그런데 거기서 거기인,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게임이 쏟아지면서 유저 피로도가 급격히 쌓이게 됐다.

1982년에 출시된 ‘커스터의 복수’라는 게임이 있다. 저질 게임의 표본으로 널리 인용되는 타이틀이다. 게임 주인공은 인디언과 싸움에서 전사한 커스터 장군이다. 유저는 그를 조종해 인디언 여성을 강간해 복수에 성공하면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정점은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그해 6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가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아타리는 스필버그 감독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영화를 게임으로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타리는 대목인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E.T.’ 게임을 출시하려 했다. 개발자에 주어진 시간은 5주에 불과했다.

기적일까. 아타리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계획대로 ‘E.T.’를 출시했다. 결과는 저질 게임 중의 저질 게임이었다. 게이머는 도무지 이 게임이 영화 <E.T.>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결국 대규모 반품 사태로 이어졌다. 아타리는 악성 재고를 무지막지하게 떠안게 됐다.

충격이 컸다. 아타리는 5억달러 규모의 손실을 입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아타리 직원들 상당수가 회사를 떠났다. 레이 키사르 아타리 CEO가 주식 내부 거래 혐의로 기소당하는 악재도 겹쳤다. ‘E.T.’ 악성 재고는 뉴멕시코 사막 어딘가에 생매장해버렸다.

▲ 출처=위키미디어

악순환이었다. 아타리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질 낮은 게임 유통에 열을 올렸다. 게이머의 외면은 돌이키기 힘들었다. 시장에 돈줄이 막히기 시작했다. 북미 게임 시장은 곧바로 얼어붙었다. 30억달러 규모로 평가를 받았던 미국 게임 산업 규모는 수년 만에 1억달러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아타리 쇼크는 결국 제2의 아타리 쇼크가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를 남긴 채 기억되고 있다. 위기의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이 표현이 다수를 통해 발화됐다. 최근 우리나라 게임 업계 관계자들도 모바일 게임 양산 문제를 두고 제2의 아타리 쇼크를 운운하곤 한다.

기회와 흥분 속에는 위기의 그림자가 담겨있는 법이다. 최근 우리 게임 업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IP(지적재산권)이다. 유명 IP를 중심으로 플랫폼과 분야를 넘어선 다각화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과도한 다각화로 기존의 IP 가치도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돈이 가치를 압도하면 아타리 쇼크는 예전과는 다른 얼굴로 찾아오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