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험금 관련 공방이 ‘2라운드’로 돌입하게 됐다.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에 대해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약관에 적시했음에도 미지급해왔던 생보사들의 책임이 크다는 반론도 나오는 상황.

금융감독원이 보험업법 위반과 관련해 제재를 가하겠다고 압박을 넣고 있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지급관련 특별법까지 추진돼 자살보험금을 둘러싼 줄다리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소멸시효 지난 자살보험금 2003억원…전체 78%

30일 대법원 3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교보생명이 고객 A씨를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A씨의 자살보험금 청구권은 소멸시효 기간이 완성돼 존재하지 않는다”고 최종판결했다.

A씨의 부인 B씨는 2004년 5월 A씨를 보험수익자로 해 특약에 따라 자살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사망보험을 들었다. 2006년 7월 B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남편 A씨는 보험금 지급을 청구해 사망보험금 5000만원을 받았지만, 뒤늦게 추가 자살보험금을 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A씨가 2014년 자살보험금을 청구하자 보험사가 소송을 냈다.

판결의 쟁점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난 이후에도 보험사가 보험금을 줘야 하는지 여부였다.

보험사는 B씨 자살 후 2년이 지나 보험금을 청구해 A씨의 청구권은 이미 사라졌다고 주장했고, A씨는 보험금 지급의무가 있는 보험사가 자신을 속여 사망보험금만 줬기에 청구권은 유효하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보험사가 A씨를 속였다는 증거가 없고, 보험사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이 권리남용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하며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올해 2월 기준 14개 보험사가 덜 지급한 자살보험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총 2465억원으로 집계된다. 이 중 청구권 소멸시효 2년이 지난 보험금은 2003억원으로 무려 78%에 이른다.

소비자 원성 높아…보험사 ‘꼼수’ 지적

반면 소비자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보험금 지급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항목만 선택적으로 설명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생보사들은 지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보험가입 2년 후 자살한 경우에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약관을 기초로 약 280만건의 사망보험을 판매했다.

하지만, 약관 내용이 ‘표기상의 실수’라며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해왔다.

이후 관련 민원이 발생하자 생보사들은 2010년 4월부터 자살을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형식으로 약관 개정했다.

대다수의 소비자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피보험자가 자살한 경우 일반사망보험금을 지급 받아왔다.

문제가 커진 가운데 올해 5월 대법원은 ‘약관 해석에 관한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을 적용해 자살에 따른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판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보사들은 청구기간 2년이 지난 자살보험금은 소멸시효가 완성돼 지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약관 내용에 대한 실수를 빌미로 미지급하는 ‘꼼수’를 쓰고도 몰랐던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행위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소비자연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판결은 생보사들이 알면서도 지급하지 않거나 설명조차 하지 않은 불법행위를 묵인한 것”이라며 “생보사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만큼 대국민 사과를 하고, 금융당국은 보험업법 위반과 소비자 기망행위에 엄중한 행정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감원 “미지급은 보험업법 위반…제재 가할 것”

감독당국인 금감원은 민사상의 책임과는 별도로 미지급 생보사들에 대한 제재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금감원은 약관에 자살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해 놓고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한 행위 자체가 보험업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에 시간을 끌어 소멸시효가 지난 경우가 많다고 금감원은 보고 있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6월부터 자살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는 생명보험사(생보사) 중 비중이 높은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에 대한 현장점검을 진행했다. 이를 토대로 제재수위를 결정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살보험금 지급을 이끌어낼 계획이다.

국회에서도 법 개정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새누리당 김선동 국회의원은 소멸시효가 완성된 자살보험금 지급을 위해 소멸시효 특례를 적용하는 ‘재해사망보험금 청구기간 연장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발의 하겠다고 밝혔다.

김선동 의원은 “특별법 제정으로 생명보험회사는 배임죄 적용 우려를 해소할 수 있고, 보험계약 당사자분들은 개별적으로 또다른 소송을 진행하는 불편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생보사 ‘눈치싸움’ 시작…일부는 미리 지급 결정

생보사들은 엇갈린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부 보험사들은 대법원 판결과 별도로 지난 5월부터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미지급 액수가 가장 많은 ING생명(815억원)을 포함해 신한생명(99억원), 메트라이프(79억원), PCA생명(39억원) 등 7개 회사가 자살보험금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삼성생명(607억원), 교보생명(265억원), 한화생명(97억원) 등 상위 3사를 비롯해 알리안츠·동부·KDB·현대라이프 등 7개사는 자살보험금 지급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상위 3개사가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입장을 정하겠다는 보험사들이 많았다”며 “대법원 판결로 소멸시효 지난 보험금에 대한 지급의무는 면하게 됐지만 감독당국의 제재와 더불어 소비자 신뢰도 회복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지급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생보업계 관계자는 “논리적으로는 지급할 의무가 없지만 금감원의 제재라는 변수가 있어 지급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곤란한 상황”이라며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