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10월 1일 조 프레이저를 쓰러뜨린 후 포효하는 무하마드 알리. 출처=무하마드 알리 트위터

무하마드 알리는 위대한 복서이기도 했지만 70년대 백인 사회의 차별에 굴복하지 않은 투쟁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올림픽 금메달도, 챔피언 벨트도 심지어 복싱이라는 타이틀의 왕좌도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했던 건 인종차별에의 투쟁과 반 전쟁의 이념, 그리고 까르띠에 탱크였다.

 

전설의 경기 이후, 까르띠에 탱크

▲ 1975년 보스턴 WCVB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무하마드 알리 초상. 출처=Timezone

1974년은 알리가 조지 포먼과 경기를 한 날이다. 맞다. 지금까지도 전설의 시합이라 불리고 있는 그것이다. 알리와 조지포먼의 시합은 단순한 권투시합이 아니라 인종차별의 양 극단에 선 인물 간의 대립이기도 했고 동시에 반전 분위기를 조성하는 흑인 영웅의 성공을 막기 위한 공개처형이기도 했다. 당시 알리는 병역거부 이후로 3년의 공백을 가졌던 32세의 늙은 파이터였고, 조지 포먼은 40연승의 36KO 기록을 세우고 있던 전율의 강타자, 무패를 자랑하는 25세의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알리의 승리를 예측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알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패배할지에 대한 농담들로 하루를 보냈다. 당시 도박 배당 비율은 9:1이었다. 10월 30일, 이윽고 세계인이 주목하는 경기가 시작되었고, 알리는 조지 포먼의 턱에 특유의 펀치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1) 쏘았다. 경기는 8회 KO. 알리의 승이었다. 훗날 복싱 역사상 최고의 파란으로 기록된 이 경기 이후 알리는 WCBV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자랑스럽게 초상을 촬영했다. 그의 손목에는 까르띠에 탱크가 채워져 있었다.

 

탱크는 알리의 펀치를 기억하고 있다.

▲ 1976년 푸에르트리코에서 촬영한 두번째 초상. 출처=Timezone

알리가 언제부터 까르띠에 탱크를 착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리가 활약하던 70년대에는 앤디 워홀도, 알랭들롱도 까르띠에 탱크를 착용했다. 앤디 워홀은 “난 시간을 보려고 탱크를 착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탱크이기 때문에 착용하는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이브생로랑, 세자르 등 한 시대에 획을 그은 사람들 중 다수가 탱크를 각별히 사랑했으니 탱크는 뭔가 다른 시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알리의 탱크는 더욱 특별하다. 인종차별의 슬픔과 함께 강에 던졌던 올림픽 메달2)도, 반전을 주장하다 빼앗긴 챔피언 벨트3)도 알리에게는 한낱 물건에 불과했지만 그런 알리에게도 까르띠에 탱크는 소유해야 하는 ‘무언가’였다. 알리는 까르띠에 탱크를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뿐만 아니라 캐주얼한 복장에도, 복싱 트렁크 차림에도 손목 위에 올렸다.

 

첫째도, 둘째도 까르띠에 탱크

▲ 1976년 푸에르트리코에서 까르띠에 탱크를 보고 있는 무하마드 알리. 출처=Revolution

그의 첫 번째 까르띠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그의 두 번째 까르띠에의 구입은 1976년 2월 14일 푸에르토리코(장 피에르 쿠프맨과의 대결을 위해 연습을 하던 곳)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은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올랐을 때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76년 알리가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45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에 몰렸던 최대 인파가 약 50만 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먼 나라 한국에서 45만명을 모은 알리의 인기는 가히 범세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1976년 당시 선택한 시계는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시계도 아니고, 호사롭고 화려한 디자인도 아닌 정갈한 까르띠에 탱크였다. 가장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그 당시에 말이다.

가난한 집의 흑인 아이로 태어나 두 주먹만으로 차별과 싸우고, 약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그로 인해 반전운동의 불씨는 거세지고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수 있었다. 그가 까르띠에 탱크를 선택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런 장식 없이 그 모습 자체로 특별한 까르띠에 탱크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시계가 알리 자신과 잘 어울렸음은 말할 필요가 없음이다. 까르띠에의 탱크는 지금까지도 화려한 장식 없이 그 모습 자체로 성공과 품위를 의미한다.

 

주석 1) 1964년, 알리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 <소니 리스톤>에게 도전해 7회 KO로 승리를 거뒀다. 경기에 앞서 그가 남긴 명언이 바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였다.

주석 2) 1967년,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당시 알리는 징집에 반대한 대가로 기소되었고, 5년의 실형을 선고받으며 세계 챔피언을 박탈당했다. 알리가 징집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깜둥이(Nigger)라고 부르지 않는데,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 나는 차라리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였다. 알리의 병역거부는 이후 반전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주석 3) 1960년 알리는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 동네 식당을 찾았을 때 “흑인에게는 음식을 팔지 않겠다.”라는 이유로 식사 제공을 거절당했다. 인종차별의 아픔과 울분을 참지 못한 알리는 강에 금메달을 던져버렸다.

 

<참고문헌>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 / 다큐멘터리 ‘우리가 왕이었을 때’ / 영화 ‘더 그레이티스트 –1977년’ / revolution / Timezone / 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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