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한 포지셔닝의 승리다. 2000년대 후반 PC 시장 핫 키워드는 단연 ‘넷북’이었다. 세계 경제 불황이 닥친 시대 배경 탓인지 작고 가볍고 저렴한 넷북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노트북 대비 성능은 떨어졌지만 가격 장벽을 무너트리면서 일종의 모바일 컴퓨팅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넷북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탄생 10주년을 채우지 못하고 시장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시장성이 위축되면서 PC 제조사들이 더 이상 넷북을 생산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IT 골동품이 된 넷북이다. 넷북이 남긴 유산은 다양한 형태의 모바일 컴퓨팅 디바이스들이 계승하고 있다.

모바일 컴퓨팅 가격 혁명

‘XO-1’이 사상 첫 넷북이라는 데엔 큰 이견이 없다. ‘100달러 PC’라고 불린 이 컴퓨터는 MIT 미디어랩 작품이다. 개발도상국에 교육 전용 초저가 모바일 PC를 보급하는 프로젝트 결과물이다. 2005년 1월 발표됐다. 오로지 인터넷과 교육용 프로그램만 탑재된 제품이다.

시장에서는 에이수스의 ‘EeePC’를 넷북의 아버지로 본다. 2007년 출시된 EeePC 700 시리즈는 콘셉트가 명확했다. ‘저렴한 가격과 휴대가 간편하고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노트북’이라는 콘셉트다. 인텔 저가형 CPU 셀러론M을 탑재했으며 디스플레이 크기는 7인치에 불과하다. 가격은 300달러대다.

▲ 출처=에이수스

다음해 인텔은 넷북 시장에 대응한 저가·절전형 CPU 아톰 프로세서를 선보였다. 이후 AMD 애슬론 네오, 비아(VIA) 나노 등 적당한 성능을 지닌 염가 CPU가 속속 등장했다. PC 제조사들은 에이수스를 따라 경쟁적으로 넷북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넷북 시장이 본격화됐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IDC는 넷북의 개념을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넷북은 가격이 500달러 미만에, 7~10인치 디스플레이를 갖추고, 키보드를 탑재하며,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모바일 PC를 의미한다. 간단한 웹 서핑이나 문서 편집에 특화된 미니 노트북 정도로 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가격 혁명’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노트북 가격은 1000달러를 훌쩍 넘기 일쑤였다. 넷북은 이를 절반 이하로 낮춘 제품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주도로 형성된 울트라 모바일 PC(UMPC) 제품군이 가격이 비싸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과는 대비된다. 가격 문턱이 낮아지자 더 많은 이들이 모바일 컴퓨팅 환경으로 진입했다.

'가성비 트렌드' 역사는 반복?

PC 제조사들은 PC 시장 침체 극복 대안으로 넷북을 내세웠다. 거의 모든 브랜드의 넷북을 만나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2009년 넷북 시장은 전년 대비 2000%의 성장률을 기록했을 정도다. 넷북 판매량이 노트북과 데스크탑 판매량을 앞지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넷북의 인기는 2008년 말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경기 침체와도 연결된다. 합리적 소비 경향이 짙어지면서 적당한 성능에 가격이 저렴한 넷북을 택하는 소비자가 늘어난 것으로 추측되는 까닭이다. 경기 불황과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트렌드가 연결되는 장면과도 겹쳐진다.

이머징 마켓의 부상에도 영향을 받았다. 당시 아시아·남미 신흥 시장 중심으로 PC 보급이 이뤄지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넷북 수요가 급증했다는 설명이다. 시장이 무르익기 전에는 저가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경향이 짙은데, 넷북이 그 수요에 대응하는 PC 제품군이었다는 얘기다.

핵심 콘셉트를 상실하다

2013년 에이수스와 에이서는 넷북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에이수스는 넷북의 원조다. 에이서는 넷북을 가장 많이 팔아치운 회사다. 사실 두 회사는 마지막으로 넷북 생산 중단을 결정했다. 이미 2011년 말을 기점으로 대부분 PC 제조사가 생산을 중단했다. 넷북의 멸종이다.

넷북의 최고 전성기는 2010년으로 기억된다. 출하량이 3214만대에 달했다. 2013년에는 고작 397만대가 팔렸다. 2012년과 비교해도 72%나 떨어졌다. 빠른 속도로 시장이 무너지자 제조사들은 서둘러 시장을 떠났다. 넷북을 끝까지 생산하겠다던 에이수스까지 말이다.

“넷북의 문제는 어디 하나 좋은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넷북은 그냥 저렴한 노트북일 뿐이죠.” 스티브 잡스가 2010년 아이패드를 소개하면서 남긴 말이다. 아이패드의 등장과 함께 넷북의 입지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패드를 겨냥한 안드로이드 태블릿이 대거 등장하면서 넷북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넷북은 태블릿보다 크고 무거웠다. 배터리 지속 시간은 짧았으며 부팅 시간은 너무 길었다. 사용성에 있어서도 터치 인터페이스를 채용한 태블릿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넷북 진영은 물리 키보드를 탑재해 문서 작성에 유리하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태블릿에 블루투스 키보드나 키보드 커버를 연결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넷북은 빠른 속도로 상품성을 잃어갔다.

업체들은 생존하기 위해 차별화를 꾀했다. 화면을 키우고 성능을 업그레이드했다. 그러면서 가격은 비싸게 받았다. 이 과정에서 넷북은 핵심 콘셉트를 상실했다. 끝내 시장 소멸로 이어졌다. 현재는 투인원·태블릿·울트라북 등이 넷북의 유산을 계승해 모바일 컴퓨팅 디바이스 부문에서 경합하고 있다. 이 중 어떤 디바이스는 넷북처럼 유산을 남긴 채 소멸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