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소프트웨어 판매업 등을 영위하는 A 사는 블리자드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국내독점판매계약을 체결하면서 블리자드가 국내 및 미국에서 가지는 등록상표 ‘STARCRAFT’(지정상품 : 오락용 컴퓨터소프트웨어)에 대한 전용사용권을 설정했다. B는 미국에서 출판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19.95달러에 판매하는 X로부터 게임 6000개를 개당 5.625달러에 수입한 후 이를 국내에서 판매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A 사는 B를 상대로 전용사용권 침해 금지 청구를 했다. 이에 대해 B는 자신이 수입한 제품이 해외에서 적법하게 유통되는 ‘진정상품’이기 때문에 전용사용권 침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타당할까?

최근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JTBC 드라마 <청춘시대>의 등장인물 강이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진 후 그 첫걸음으로서 자신이 구매한 온갖 명품 가방, 구두 등을 처분한다. 그런데 상표법은 ‘등록상표가 표시된 상품을 양도 또는 인도하는 행위’를 상표 침해 행위 중 하나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형식적으로 보면 강이나가 명품 브랜드가 표시된 제품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한 행위는 명백한 상표 침해 행위이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씁쓸하다. 자신이 구매한 상품을 되파는 것이 위법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누구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상표법의 결론 역시 위와 같은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상표법상 강이나의 행위는 상표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때 그 근거가 되는 것이 ‘상표권의 소진 이론’이다.

상표권의 소진 이론이란, 상표권자 또는 정당한 사용권을 가진 자가 적법하게 상표를 부착한 제품이 한번 판매된 후에는 그 제품에 상표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특징을 본따 ‘최초판매의 원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진 이론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법리이지만, 그 범위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로 확장되는 경우에는 그리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된다.

한 커플이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저렴한 가격으로 ‘Coach’ 브랜드 가방을 여러 개 사 왔다고 하자. 가족, 친지, 지인에게 한 개씩 나누어 줬는데도 생각보다 가방이 많이 남아서 이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판매하려고 한다. 이 경우에도 소진 이론이 적용될 수 있을까? 상표 제도는 속지주의(屬地主義)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국가별로 등록해야만 해당 국가에서 상표의 효력이 발생한다. 즉, 동일한 모양의 상표이더라도 미국에 등록된 상표와 국내에 등록된 상표는 엄연히 별개의 상표이다. 따라서 소진이론에 따라 이 커플이 미국에서 구매한 ‘Coach’ 가방에 대한 미국에 등록된 상표의 효력은 소진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국내에 등록된 상표의 효력은 소진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국내 및 미국의 상표권자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소진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도식적이고 형식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 사례에서는 그러한 비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미국에서 적법하게 유통된 상품(이를 ‘진정상품’이라 한다)을 구매함으로써 그 상품에 대한 상표권의 효력이 이미 소진되었는데 단지 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상표권자가 다시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상표권자와 국내의 상표권자가 다른 경우는 어떨까? 그리고 미국 및 국내의 상표권자가 동일하더라도 국내에 별도로 전용사용권자가 존재하고 전용사용권자가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제품에 같은 상표를 부착해 판매하고 있다면 어떨까? 이 경우에도 국내 상표권자와 전용사용권자의 이익을 무시하고 소진 이론을 적용해야 할까? 이것이 ‘진정상품의 병행수입과 국제적 소진이론’ 문제에 있어서 획일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STARCRAFT’ 병행수입 사건에서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대법원은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이 적법한 것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ⅰ) 외국 상표권자 내지 정당한 사용권자가 수입상품에 상표를 부착할 것, (ⅱ) 외국 상표권자와 우리나라의 등록상표권자 사이에 법적 또는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그 밖의 사정에 의해 수입상품에 부착된 상표가 우리나라의 등록상표와 동일한 출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ⅲ) 수입상품과 우리나라의 상표권자가 등록상표를 부착한 상품 사이에 실질적인 품질 차이가 없어야 할 것, 이 3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06. 10. 13. 선고 2006다40423 판결).

(ⅰ)항과 (ⅲ)항은 ‘진정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갖추어야 할 요건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수입 제품과 국내 제품에 부착된 상표가 ‘동일한 출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가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 될 것이다. 위 STARCRAFT 사건에서 법원은 ‘STARCRAFT’ 상표에 대한 미국 상표권자와 국내 상표권자가 동일하고, 국내의 전용사용권자인 A 사가 국내에서 독자적인 영업상 신용을 쌓아옴으로써 국내의 일반 수요자들 사이에 국내 등록상표의 출처를 블리자드 사가 아닌 A 사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으므로, B사의 수입제품에 부착된 상표가 국내의 등록상표와 동일한 출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함으로써, A 사의 청구를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