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리는 비에 우산도 없다면? 위기지만 그녀의 명품 백이 진품인지 가품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우산 대신 핸드백으로 비를 막는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가품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 반기를 드는 부자들도 있다. 자신들은 세찬 소나기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품 백을 머리 위에 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명품 백보다 몇 배는 더 소중한 것이 자신의 머릿결이라는 부연 설명도 따른다. 일리는 있지만 명품 백을 에코백처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계는 한 술, 아니 몇 술은 더 뜬다. 예물로 마련한 고가의 시계는 장롱 속에 있는 날이 더 많다. 아주 특별한 날, 그것도 최대한 조신하게 행차를 하는 귀한 몸이시다. 심지어는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A급 가품을 구입해 차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니 말 다했다. 손목에 차지 않고 장롱 속에 넣어둘 시계를 대체 왜 샀을까?

 

▲ 스크래치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파네리스티들의 흔한 단체 인증샷. 출처=54 파네리스티 퍼블릭 포럼

시계는 손목에 차야 제맛이다. 고가의 명품일수록 그렇다. 이를 몸소 실천하는 시계 브랜드가 파네라이다. 파네라이 차는 사람들의 자생적 커뮤니티인 파네리스트들 사이에 파네라이는 스크래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데일리 워치고, 그들도 이 대목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무용담이지만 근거 없는 허풍은 아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군사기밀에 속했던 파네라이는 그 태생부터 남다르다. 파네라이는 1860년 플로렌스의 공방에서 시작해 워치메이킹 스쿨과 부티크를 병행하면서 수십 년간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 장비를 납품해왔다. 특히 다이빙과 관련된 정밀 장비들이 압권이었다. 이 기간 동안 파네라이가 발명한 루미노르와 라디오미르 디자인은 오랫동안 군사 기밀로 묶여 있다가 1997년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되고 나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군용시계의 DNA를 지닌 만큼 파네라이의 시계는 튼튼하고 믿음직스럽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스크래치 따위는 안중에 없다. 만약 이런 배경 지식이 없다면 파네라이의 시계를 갖고도 스크래치 날까 두려워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두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 해군 출신 시계 브랜드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클래식 요트 챌린지. 출처=파네라이

이렇듯 독창적이고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돈과 노력도 필요했다. 럭셔리 데일리 워치의 위상을 잘 대변하는 것이 파네라이가 후원하는 요트 대회이다. 파네라이는 해군 출신답게 2005년부터 빈티지 & 클래식 요트 국제 대회인 ‘파네라이 클래식 요트 챌린지’를 후원해오고 있다. 무려 20세기 초에 건조된 요트부터 최근 건조된 요트까지 다양한 요트들이 지중해 위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데 그야말로 장관이다. ‘루미노르 1950 레가타 3 데이즈 크로노 플라이백 티타니오’라는 시계는 이 대회의 심벌과 같다. 3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오토매틱 무브먼트 P.9100R 칼리버와 요트 레이스를 시작하는 순간 카운트다운을 실행할 수 있는 레가타 기능을 갖추는 등 요트에 최적화된 스펙을 자랑하는 루미노르 1950 레가타 3 데이즈 크로노 플라이백 티타니오는 전문 항해용 워치답게 100미터 방수 기능을 제공하며, 당연히 러버 스트랩으로 출시되었다.

최근 파네라이는 지중해를 호령하던 이탈리아 해군을 위해 제작한 시계를 70여년 만에 복원한 150점 한정판 모델 ‘마레 노스트럼 티타니오’를 공개해 화제가 되었다. 럭셔리 데일리 워치의 DNA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시계는 4700만원대의 고가로 국내에 단 1점 입고되었다. 중세 판타지 미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계에 얽힌 스토리에 귀를 쫑긋 세울 것이다. 과거 로마 제국이 이집트와 스페인을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보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럼(우리의 바다)’라고 부르며 권세와 명예를 모두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 뒤 이탈리아가 ‘마레 노스트럼’을 다시 언급한 짧은 시기가 있었는데, 2차대전 중에 이탈리아 해군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해 지중해의 주인임을 일깨운 그때였다. 당시 파네라이는 1943년 이탈리아 해군의 갑판 사관들을 위해 제작된 크로노그래프에 마레 노스트럼이란 이름을 붙여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레트로 워치 붐과 맞물려 70여년 만에 부활한 마레 노스트럼 티타니오는 직경이 55㎜에 달하는 대형 케이스에 압력과 외부 응력 및 부식에 강한 구조이자 강철보다 경량성을 자랑하는 브러시드 티타늄 소재로 마감되었다. 군사기밀 수준의 성능과 디자인으로 중무장했지만 튼튼하고 가벼워서 매일 차고 다니기에 최적의 시계인 것이다. 이런 전쟁 영웅의 시계를 장롱 속에 모셔둔다는 것은, 뭐랄까 직무유기에 가깝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혼수와 예물 시즌이 되었다. 형식을 최소화하는 스몰 웨딩이 유력한 트렌드지만 애플워치를 예물로 할 정도로 가볍진 않다. 예물의 하이라이트라 할 고가의 시계를 고르기 전에 철저한 예습이 필요하다. 아울러 장롱 속에 모셔둘 시계에 필요 이상의 지출을 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허례허식이란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지구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계 집결지 [타임피스 서울투베이징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