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통령, 어린이의 대통령이라는 인기 캐릭터 뽀로로가 나오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등장인물들은 성격이 꽤나 선명하다. 수컷 곰인 포비는 낚시를 즐기는 만능 기술자이고, 수컷 여우 에디는 못 만드는 게 없는 천재 발명가다. 뽀로로와 크롱은 말썽꾸러기 남자아이 모습 그대로다. 반면 암컷 수달 루피는 친구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늘 분주하다. 암컷 펭귄 패티는 루피처럼 요리를 잘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뽀롱뽀롱 뽀로로>에는 세상을 양분하는 선분 하나가 선명하게 담겨있다. 강함과 약함. 경쟁과 돌봄. 단단함과 부드러움. 능동성과 수동성.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초월과 내재. 질서와 무질서. 문명과 자연. 전쟁과 평화. 형상과 질료.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주체와 타자. 합리성과 비합리성. 지배와 종속. 공격자와 피해자. 길고 복잡하니 단 하나의 대립항으로 요약하자. 남성성과 여성성.

양자의 ‘차이’가 아니라 한쪽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기에 저 선분(選分)은 성벽이다. 권력과 부가 몰리고 온갖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성내(城內)는 남성의 영역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성벽이 견고했던 건 왜일까? 건축자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여자는 여자(Sex)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Gender)로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말은 이 벽을 비신화화(非神話化) 했다. 성차별은 생물학적 성차(Sex)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성차(Gender)에 근거한다.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라 그렇게 길러진 것이다.

‘섹스’와 ‘젠더’가 꼭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젠더에 따른 실천은 신체에 영향을 끼친다. 과거 중국인은 여성의 발이 작을수록 아름답다고 믿었다. 아름다움을 강요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는 언제나 있고, 그 결과 일부 여성은 잔인할 정도로 작은 발을 가져야 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정말로 힘이 센가? 어느 정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격차는 분명 문화의 결과다. 사회가 마르고 약한 몸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여성은 충분히 더 강해질 수 있다. 그 형태가 바뀔 뿐 전족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성’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면, 대립항의 운명도 다를 리 없을 터. 인종, 국적, 세대, 문화, 계급을 초월한 보편적 남성성이 있다는 생각 역시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사회학자 레윈 코넬은 <남성성/들>에서 남성들은 본래 제각각 다르지만, 시대마다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승인받는 남성성 모델이 있으며, 그것이 유일한 남성성으로 신화화된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생각보다 남성과 다르지 않고, 남성‘들’은 생각보다 서로 다르다. 성벽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과장하고 왜곡하는 동시에 남성‘들’ 사이의 차이를 축소하고 은폐할 뿐이다.

▲ 출처=디즈니

‘남자란 본래’로 시작하는 고리타분한 말들은 여성만 괴롭히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구성하는 건 생계 부양자이자 가족의 보호자로서 이성애-중산층-가부장-비장애인-남성이다. 이 정상성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 가령 동성애자, 저소득자나 실업자, 미혼, 장애인 등은 충분히 남자답지 못한 존재로 강등되기 마련이다. ‘남성성’이라는 허구적 정체성을 빌리지 않고도 자신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건 너무나도 시급하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보다 인간다운 인간, 자유로운 개인이 훨씬 소중하니까.

도티 닥터 맥스터핀스는 디즈니에서 만든 아동용 애니메이션 <꼬마 의사 맥스터핀스>의 주인공이다.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자아이가 고장 난 장난감을 치료하는 꼬마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데는 부모의 영향이 크다. 아이의 엄마 마이샤 맥스터핀스의 직업이 의사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빠 마커스 맥스터핀스는 요리를 아주 잘하는 멋진 전업주부로 나온다. 사람은 보고 배운 대로 산다고 한다. 두 애니메이션 중 어느 쪽이 아이들에게 유익한지는 새삼 되물을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