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하다 보면, 전시장 청소 아주머니와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년 전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단체전을 기획했는데, 그중 지아니 카라바지오(Gianni Caravaggio, 1968~)의 <Cosmicomica!>는 다면체의 대리석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주황색 씨앗이 흩뿌려진 작품이다. 깔끔하신 청소 아주머니로 인해 얼마 못 가 이 씨앗들은 말끔하게 버려졌고, 그 잔해라도 찾기 위해 모든 직원들이 청소기 먼지봉투 안을 샅샅이 뒤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 후부터는 생사(?)가 위험한 작품의 경우,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작품입니다’라고 명기해두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이외에도 현대미술에서 작품인지 쓰레기인지 구분이 안 되어 생긴 일화는 너무나 많다.

이와는 반대로, 버려진 것들을 그러모으고 편집하여 새로운 예술품으로 탄생시키는 작업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각종 산업폐기물이나 기계 및 공업품의 잔해로 이루어진 작업들이 등장했으며 ‘정크아트(Junk Art)’라는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브라질 출신의 빅 뮤니츠(Vik Muniz, 1961~)는 작품 소재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가다. 어른들로부터 등짝 스매싱 당하기 쉬운 설탕, 초콜릿, 케첩, 땅콩버터, 스파게티 면과 같은 음식물을 비롯하여 미술관에서 모은 먼지와 흙까지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한다. 땅콩버터로 모나리자를 그리고, 스파게티와 토마토 소스로 메두사를 재현한다. 초콜릿 시럽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초상을 그리는가 하면 다이아몬드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은 사진을 통해서만 남겨지며 촬영 직후 폐기된다. 참신하고 재기 발랄한 소재로 명화를 패러디하거나 유명 인물의 초상작업에 몰두했던 빅 뮤니츠는 돌연 쓰레기 매립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2016년 하계 올림픽의 나라, 화려하고 정열적인 나라로만 알고 있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쓰레기 매립지가 있다. 자르딤 그라마초 쓰레기 매립장.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그곳에 여전히 계급사회가 존재한다. 아무도 관심 없는 그곳에 빅 뮤니츠가 발길을 돌린 건, 그 역시 어린 시절 쓰레기 더미에서 생계를 찾고 정육트럭에서 고기찌꺼기를 삽으로 떠내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빈민가의 삶에서 그는 우연히 싸움을 말리던 중 총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고, 전화위복으로 가해자로부터 큰 보상을 받아 그 보상금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그는 뉴욕을 터전 삼아, 늘 접하는 소재를 작업의 재료로 활용하여 예술과 사회적 관계의 결합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이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전시되고 갤러리와 경매회사에서 고가에 팔려나갔다. 이제 그는 빈민촌의 쓰레기 줍는 이가 아닌, 브라질이 낳은 최고의 현대미술가라는 수식어로 표현된다. 이러한 그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협업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라마초 쓰레기 매립장은 브라질 리우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곳이다. 까마귀로 들끓고 며칠에 한 번씩 시신이 발견되기도 하는 이곳에도 사람이 있고 사회가 있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재활용 폐품을 찾는 빈민들을 ‘카타도르’라 부른다. 플라스틱, 판지, 고철과 음료수병에 이르기까지 매일 200여톤의 재활용품을 골라내는 사람들이다. 빈민가의 쓰레기와 백만장자의 쓰레기가 차별 없이 모두 한데 모여 섞인 곳. 그곳의 카타도르는 절망적인 표정이 아닌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 그들은 자식에게 이 일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애쓰며, 쓰레기더미 속에서 찾은 버려진 책을 주워 모아 빈민촌에 도서관을 만들 꿈을 꾼다.

▲Marat/Sebastiao — Pictures of Garbage. Photograph by Vik Muniz, courtesy of Vik Muniz Studio. (@vikmuniz.net/gallery­)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사회에서 거부당한 이들을 알리고, 쓰레기를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에 참여시키고자 빅 뮤니츠가 나섰다. 그가 만난 카타도르의 초상을 촬영하고 크게 확대하여 투사한 후, 윤곽과 음영을 따라 쓰레기를 채워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사진으로 남긴다. 버려진 욕조에서 <마라의 죽음>을 패러디하고 노동자의 몸과 얼굴을 고스란히 담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과정에서부터 이미 글로벌 미술품 경매회사의 매각 계약을 진행했다. 가장 아래의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서 시작한 이 작업들은 가장 고귀한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나 상류층의 사랑을 받게 된다. 빅 뮤니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위아래의 구분이 사라졌다. <쓰레기로 만든 작품(Pictures of Garbage)>은 환상적인 예술 작품이란 평가를 받으며 경매기록을 경신한다. 그리고 작품의 판매수익은 카타도르에게 돌아갔다.

참신한 소재에 집중하여 작업했던 빅 뮤니츠에게 이번 작업은 단순히 새로운 소재 발견의 차원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쓰레기와 다를 게 없는 삶을 사는 그들의 삶을 바꾸는 일. 예술이 삶을 바꾸는 경험을 만드는 일. 잠시라도 원래 자리에서 떠나 주변을 바라보게 만드는 일. 이것이 그가 작업하는 이유다.

장자는 “사람들은 유용(有用)한 것의 쓰임은 잘 알지만, 무용(無用)한 것의 쓰임은 잘 모른다”고 했다. ‘무용’이란 단어가 쓸모없다는 뜻인데, 쓸모없음의 쓰임이란 말이 아이러니하다. 그 쓰임을 찾는 예술가의 혜안이나 직관이 일반인과 구분되는 점이다. 무용에서 유용을 찾는 것. 더 나아가 쓸모없음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예술의 역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