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최저임금이 결정됐다. 시급 6470원이다. 올해보다 7.3% 올랐다. 월급으로는 주 40시간 기준 135만2230원, 주 44시간 기준 146만2220원이다.

최저임금은 노동자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함으로써 내일도 일터에 나갈 수 있는 '생존'임금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헌법(제32조 1항)을 근거로 최저임금법을 제정해 최저임금 수준을 높여왔다. 2000년대 이후 인상률은 연평균 8.6%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선두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 대비 최저임금 수준도 OECD 내 8위로 미국이나 일본보다 높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나라 최저임금제도는 나름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사정은 이와 다르다. 최저임금위 결정이 나왔지만 경영계는 결정의 철회와 재조정을 요구하고 있고, 노동계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계난을 외면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앞서 결정과정도 파행을 겪었다. 14차례 회의에서 사측은 ‘최저임금의 동결’을 주장했고 노측은 66% 인상(1만원)을 요구했다. 양측은 아무런 절충안도 내놓지 않은 채 평행선을 달렸다. 지금의 ‘6470원 인상’안도 사용자위원 중 소상공인 대표, 그리고 근로자위원 전원이 퇴장한 가운데 표결로 결정됐다.

그런데 최저임금의 지급 주체는 정부나 대기업들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노동자에 주는 것은 편의점 치킨집 등 영세업체들이다. 대상업체 70%가 노동자 5명 미만이며 이들 자영업자의 다수는 사업소득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칠 정도다.

그럼에도 경총 등 사용자단체들과 최저임금 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민주노총 등 노동자단체가 최저임금위원회 협상을 좌지우지한다.

어떻게 보면 돈을 낼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남들이 나서 올려주니 마니 인심을 쓰는 격이다.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니 합의결정이 이뤄질 리 없다. 최저임금위는 지난 30년간 한 번도 합의결정을 한 적이 없다.

정부는 최저임금을 통해 빈곤 퇴치와 소득 불평등의 완화를 기대한다. 정치권도 최저임금을 매번 선거공약에 포함시키며 인상을 독려해왔다. 하지만, 그 같은 국가적 역할을 영세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에 떠맡기는 것은 염치없다.

현행대로라면, 최저임금 인상은 영세사업장을 한계선상으로 내몰게 될 것이다. 노동 약자인 여성·청년·고령층에게 악영향을 미칠 우려도 있다. 아파트 경비원들의 경우처럼 임금 인상은커녕 일자리를 없애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최저임금을 올리면서 동시에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에 대해 직접적인 세제 지원, 근로장려세제 확대 등을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다음이다.

이른바 ‘알파고의 시대’다. IT의 발달로 경영환경이 큰 틀에서 바뀌는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일자리가 대거 사라지게 생겼다. 조만간 최저임금은 '그나마 일자리라도 있는' 사람들에 국한된 대책으로 여겨질 것이다. 기본생계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국가가 국민 모두에게 차등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세계적 화두로 떠오른 것은 이같은 상황 때문이다.

벨기에의 정치철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정의로운 사회란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다”라고 주장한다. 무엇을 할 ‘형식적 자유’뿐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수단’까지 갖고 있는 사회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만일 내가 무일푼이라면, 내가 굶어 죽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거나 혹은 형편없는 직업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면, 나는 실제로는 그 직업을 거부할 자유가 없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경제전문가 가오렌쿠이도 중국 고사에서 비슷한 예를 들고 있다. 진(晉)나라 혜제는 흉년으로 굶어 죽는 백성을 보고 “(곡물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라고 물었다는데, 백성들은 ‘먹지 않을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 가오렌쿠이는 “진정한 자유는 ‘지불 능력’과 결합해야만 비로소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매년 최저임금을 중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팔짱 낄 때가 아니다. 최저임금에 대한 제도적 보완은 물론 서울시의 청년보장, 성남시의 청년배당 등 기본소득 관련 정책들에 대해서도 적극 논의해야할 시점이다. 정부는 눈을 들어 세상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