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The Struggle for Recognition)’

: 인간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총족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투쟁한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해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한 고위공직자의 발언이다. 술자리 실언이라고 변명했지만 논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실언(失言)’이란 말(言)이 제멋대로 밖으로 달아나는(失) 것인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감춰둔 본심도 그때 함께 뛰쳐나온다. 사실 성인 남성이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는 말만큼 진심에 가까운 것도 없다는 건 프로이트의 도움 없이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바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에드워드 파머 톰슨에 의하면 봉기는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과 궁핍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도덕적 기대감이 무너질 때, 사회가 자신을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민중은 비로소 분노한다. 그러니 저 말은 어이없는 오해다. 먹고 살기 힘든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사람들이 정말로 못 참는 건 개‧돼지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도둑이 되지만, 모욕당한 사람은 투사가 된다. 악셀 호네트는 이런 인간의 본성에 이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오랜 기간 상식이었다. 사회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관념이 출현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와 함께 사회 역시 질문거리가 된다. 지지고 볶고 골치 아픈데 굳이 사회를 구성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쉽고 강력한 답은 이것,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호네트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그가 보기에는 생존경쟁보다 인정투쟁이 더 근원적이다. 달리 말해, 인간을 진짜로 살리고 죽이는 건 밥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이다.

“우리의 전인성은 다른 사람들의 승인 혹은 인정을 받음으로써 가능해진다.” 호네트의 말이다. 진정한 ‘나’는 외딴 섬이 아니라 사회라는 대륙 위에서 만들어진다. ‘나’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대화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너’의 인정 없이는 ‘나’도 없다. 헤겔은 아예 “인간은 인정행위”라고 말한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그들과의 투쟁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간다. 말하자면, 타인은 자아형성의 조건이자 자기실현의 토대다. 단순히 생존경쟁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정체성이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는 단순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친다. 타인의 ‘인정’은 거의 그대로 긍정적인 자기인식으로 이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사랑, 동등한 권리 주체로의 존중, 사회적 연대로의 초청은 순서대로 자기신뢰, 자기존중, 긍지로 전환된다. 반대로 학대, 권리 박탈, 배제와 혐오 등 타인의 ‘무시’는 자기증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타인을 무시하는 건 그에게서 자신감, 자존감, 자긍심을 빼앗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남이 대하는 나’에 영향을 받는다.

다문화사회라는 시대적 상황은 인정 담론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국적, 인종, 성, 종교, 출신 지역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의 말처럼, 다문화사회에서 “정당한 인정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해당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경제적 불평등의 교정을 요구하는 재분배 정의에 인정의 정치를 더해 정의 담론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차이의 인정과 정체성의 존중을 요구하는 성소수자와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 <달콤한 인생>의 유명한 대사다. 이 양복 입은 아저씨들의 질투극에서는 모욕감이 쓸데없는 파멸을 불러올 뿐이지만, 호네트의 이론에서는 다르다. 인정투쟁은 정의투쟁이다.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무시’에 저항하고, 합당한 인정을 얻기 위해 싸우는 과정은 사회를 조금 더 정의롭게 만든다. 호네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정투쟁은 “사회적 생활현실 내부에서 발전과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힘”이다. 나를 모욕하지 말라. 분노해도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 저 고위공직자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