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민간 기업에서 기술사업화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공공기관 연구개발 사업의 컨설턴트(CP라고도 합니다)로 활동하는 선배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벤처 투자나 지원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기업들을 평가해 봤던 사람입니다. 요즘은 사물인터넷, VR, 콘텐츠 관련 스타트업들과 자주 만난다고 합니다. 이른바 창조경제의 꽃으로 손꼽히는 ‘IT 벤처’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선배가 고민이 있답니다. “돈은 많은데, 지원해야 할 '애들(스타트업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제대로 된 기술과 비즈니스모델이 아니라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승부하려는 회사들이 많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입으로 벤처’를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창업 생태계에 넘쳐나는 게 문제입니다. 요즘 IT 업계에서 그럴듯한 ‘명함 한 장’을 박고 돌아다니는 ‘대표들’이 정말 많아졌습니다. 나이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입니다. 예전 같으면 소년등과(少年登科)라고 하여 젊은 사람들의 이른 출세를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봤겠지만 요즘은 이들이 창직(創職)과 창업(創業)에 이바지하는 애국자들처럼 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제대로 된 사업 모델보다는 그럴 듯한 ‘이름박기’에 열중한 나머지 유명세를 좇기 시작합니다. 경영인과 연예인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방송 출연과 강연 그리고 벤처 기업인들 간의 모임에 드나들면서 자신이 성공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기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몇몇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은 그들에게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 기업의 유명 CEO가 어느 회사로부터 몇 십억을 투자했다는 뉴스가 보도자료로 나갑니다. 그렇게 되면 없던 비즈니스 모델도 생긴 듯한 집단적 환각이 형성됩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류의 ‘입벤처’들이 여러 번 사단을 냈습니다. 혈액 진단 키트로 상당수 질병을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다고 선언했던 ‘유사 생명공학 기업’ 테라노스가 대표적입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그랬던 것처럼 대학 중퇴(그것도 스탠포드대학을) 경력을 자랑하는 젊은 CEO는 회사를 창업하자마자 유명세 만들기에 돌입했습니다. 헨리 키신저를 비롯해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자사의 사외이사로 영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몇몇 기업들이 테라노스에 투자하겠다고 나서고, 이들은 실제 비즈니스로 인한 손익분기점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시가총액이 1조가 넘는 ‘유니콘 기업’으로 정평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몇몇 연구자들과 미국 보건 당국이 조사해 본 결과 테라노스의 혈액 진단 키트가 ‘말이 안된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겁니다.

일단 정상적인 신체 상태의 혈액 채취물도 비정상으로 바꿔 환자에 대해 ‘경고 효과’로 보였던 이유는 제품 소재의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테라노스가 몇몇 컨퍼런스를 통해 발표했던 실험결과들도 조작됐거나 다른 의심되는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실리콘밸리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테라노스가 입으로 벤처를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거대한 사기를 친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회사들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연구개발투자를 필요로 하는 원천기술보다는 게임이나 서비스 중심의 앱 개발 기업들을 위주로 ‘입벤처’의 폐해가 벌어집니다. CEO는 방송 출연을 통해 엄청난 인지도를 얻고 적정 수준의 ‘개인 수입’으로 배부르게 살아가지만, 내부 직원들은 조마조마합니다. 왜냐 하면 언제 자기 회사의 본전이 들통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스타트업들의 이직률이 유난히 높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직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주기 위해 내실이 있는 사업을 하겠다’. 최근 직원들의 최저 연봉을 7만 달러로 설정해 화제가 됐던 미국의 신용결제서비스 기업 ‘그래비티 페이먼츠’ 대표인 댄 프라이스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프라이스는 사업의 본질에 대해 꽤 단순하고 명료한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 합니다.

입으로만 동기부여, 혁신이 아니라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통해 수익을 거두고 내부 구성원들이 그 성과를 ‘공유’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CEO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당장 내년에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 것인지도 분명치 않은데, 자기 이름과 명성만 소모하고 있는 스타트업 CEO들이 계시다면 정신차리시길 바랍니다. 요즘 세상은 참 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