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명사 ‘진정(眞情)’ 뒤에 ‘성질’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성(性)’이 붙어 만들어진 말

 

'베테랑' 가수가 전에 없던 긴장한 모습으로 노래한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보니, 익숙한 노래도 새삼스럽다. 카메라는 천천히 객석을 향하고, 누군가의 눈물이 클로즈업된다. 남모를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채널을 돌리니 드라마 속에는 작은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겨운 이웃들이 있다. 정작 그런 마을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문득 생각이 스친다. '그래, 저게 바로 진짜 인생이지.' 스마트폰을 여니 경쟁하듯 화려한 인생들이 펼쳐지지만, 슬그머니 우울해져 화면을 끄고 만다. 우리는 분명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

진정성 있는 사과, 진정성 있는 힙합, 진정성이 보이는 드라마, 진정성으로 지은 아파트, 심지어 진정성을 담은 짬뽕까지. 진정성이라는 말에서는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분명한 건 한 가지뿐. 무엇이 됐든, 우리는 ‘진정성’을 원한다.

진정성은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력한 도덕적 규범이다. 그러니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트집 잡을 구실이 마땅치 않다면? 고민할 거 있나. “진정성이 없어 보여!” 반대로 지지하고 싶지만, 이유가 궁색하다면? “그래도 진정성은 있는 것 같아.”

유럽의 역사를 둘로 뚝 잘라보자. 기점은 근대. 칸트에 따르면, 근대에 이르러 인류는 성인이 된다. 아직 미성년이던 때, 인간은 ‘우주’(어원상 ‘질서’라는 뜻을 갖는다)라는 안락한 집에 살았다. 신화와 신앙, 신성함과 가치로 충만한 이 집에서는 삶의 의미부터 자신의 정체성, 인생의 목적까지 원하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인간의 무지를 깨닫고 겸손히 지혜를 구하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는 이 시기를 깔끔하게 요약한다. 참된 것은 인간 안에 있지 않다.

훌쩍 자란 인류는 집을 부수기로 한다. 달리 말하면, 근대란 인간을 감싸던 전통적인 질서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근대과학은 신성한 자연을 물질로, 종교개혁은 신앙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었다.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는 무너졌고, 새롭게 형성된 사회는 계약의 산물로 치부되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 관계를 파괴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은, 초월적 질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이다. 어른이 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독립을 선언했으니, 이런 질문에도 이제 인간 스스로 답해야 한다. ‘Authenticity(진정성)’에는 ‘자유롭게 자신을 정립함’이라는 뜻과 함께 ‘(예술작품의) 원본 혹은 그 제작자’라는 어원적 의미가 있다. 누구의 구속도 없이 자신만의 영감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천재 예술가는 근대인의 이상이다.

여기서 ‘의미와 도덕의 민영화’라고 부를 만한 일이 일어난다. 예술가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듯, 우리도 각자 참된 나와 진실된 삶을 찾아 실현해야 한다. 답이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기에, 길은 내면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의 경구는 “무엇보다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햄릿>의 대사로 교체된다.

문제는 진정성이 ‘차이’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고, 대개 ‘소비’를 통해 실현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의 때가 덜 탄 듯한 상품을 찾아 ‘착한’ 소비를 하고, 대중문화가 아닌 ‘쿨’하고 ‘힙’한 비주류 문화를 즐기고, 도시를 떠나 목가적인 삶을 살며, 남과 달라 보이는 일상을 전시하는 등. ‘진정성 없(어 보이)는 것’을 피하는 것이 진정성 추구의 본질로 오해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나아가 진정성에 대한 집착은 자칫 ‘나르시시즘 문화’를 낳고, 사회를 개인으로 파편화해 정치적 연대를 약화할 수도 있다.

<슈퍼스타 K>와 <나는 가수다>가 방영된 후, 비슷한 형식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진정성에 목말라 한다는 것과 문화상품화된 진정성으로는 그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찰스 테일러는 진정성 추구의 지평을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외부로 넓혀야 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적 문제, 역사적 전통, 초월적 가치들과의 대화 속에서 진정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성 추구를 차이가 아니라 연대, 소비가 아니라 변혁, 내면의 독백이 아니라 외부로의 참여로 이끄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게 포기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본래 어려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