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嫌惡)

[명사] 싫어하고 미워함.

국어사전의 진술은 저렇게 간결하지만 혐오는 퍽 난해한 개념이다. 그러니 도움을 받자. 오늘의 도우미는 바로 똥. 갓난아이는 배변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심지어 좋아한다). 전문가들은 세 살 이전의 유아에게는 혐오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혐오는 본능이 아니다. 그 뒤편에는 사회와 문화가 작동한다. 혐오는 공포와도 다르다. 똥을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니까. 분노와도 다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부당한 일 앞에서 화를 내는데, 정의롭지 못한 똥이 있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초장부터 더러운 이야기를 하니 속이 좀 불편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단서를 잡은 셈이다.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에는 혐오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다행히도 똥 얘기는 이제 끝이다). 말하자면, 혐오는 위생학적 개념이다. 혐오는 자신을 오염시킬까 두려운 ‘더러운 것’에 대한 거부 감정이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C. 누스바움은 혐오를 둘로 구분한다. ‘원초적 혐오’는 배설물, 체액, 시체, 벌레 등을 향한 거부감이다. 저 거부감의 원인이 뭘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동물이며 언젠가 죽어 썩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원초적 혐오에는 석연치 않은 대상을 회피하게 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반면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는 그렇지 않다. ‘더러운 것’을 경멸한다는 점에서는 원초적 혐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경우의 문제는 그 ‘더러운 것’이 다른 인간이라는 데 있다. 즉, 투사적 혐오는 사람에게 잘못 투사된 혐오다. 투사적 혐오란 사회 구성원 일부를 더럽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 그들을 경멸하고 적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물론 그 대상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고상하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불편해하며, 보다 완전하고 우월한 존재가 되길 원한다. 투사적 혐오는 그 욕망을 매우 뒤틀린 방식으로 충족한다. 핵심 전략은 선을 긋고 벽을 쌓는 것이다. “저편에 인간 같지 않은 ‘더러운 것’이 있다. 다행이다. 우린 저들과 다르다.” 투사적 혐오는 자신의 온전함과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 불완전하고 더러운 누군가를 가공해내는 공정이다. 누스바움의 말처럼, 저 공정을 지탱하는 건 ‘이중의 망상’, 저들은 더럽다는 망상과 우리는 깨끗하다는 망상이다.

그렇게까지 할까 싶지만, 지난 세기 초 독일의 유대인 혐오가 게르만 민족의 신화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된 것을 떠올리면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나치는 유대인에게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었을까. 답은 단순하다. 그들에겐 유대인이 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혐오는 그렇게 타인을 ‘더러운 것’으로,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존엄한 생명이 아니라 사물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게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인정한다. 동료 시민의 권리와 존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혐오는 민주주의의 밑동을 자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물론 저 ‘모든 인간’에는 여성도 포함된다.

 

여성혐오는 조금 더 복잡하다. 모든 남성은 어머니에게 태어났고, 대부분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 여성은 마냥 배척할 수 있는 타자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과 공존하면서도 그들을 남성이 원하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정교한 체제와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여성다움’을 교육하고 강요해, 결국 그들이 ‘인간보다 여자’가 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시스템은 그 자체로 여성혐오적이다. 그 안에 사는 이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여성혐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 잠재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시스템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뿐이다.

<위대한 소원>은 루게릭병에 걸려 임종을 앞둔 남자아이의 이야기이다. 이 아이의 마지막 소원은 여성과 성경험을 해보는 것. 영화는 지난 4월 개봉하자마자 여성혐오 논란에 부딪혔다. 주인공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여성에 열광하는데 도대체 왜?

그들에게 여성은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서의 육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성을 철저하게 사물화한다. ‘혐오하지 말라.’ 이 말은 좋아해 달라는 간청이 아니다. 그것은 동료 시민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존엄과 권리를 존중하라는 요청이다. 혐오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니라 인정과 존중이다.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고 하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그 사실이 이 영화가 주는 유일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