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소질에 있는 칠수는 미국에 사는 누나의 소식을 기다린다. 다니던 극장의 미술부를 그만두게 되면서 도색공 만수의 조수로 들어간다. 만수는 반공법 위반으로 장기 복역 중인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에 고통받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은 좀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 극장 간판을 그리던 경험을 살려 칠수는 미대생이라 속이고 여대생 지나를 만나지만 결국 실연을 당하고, 기다리던 누나로부터 연락도 끊어진다. 만수 역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어느 날 작업 중이던 빌딩 옥상에서 푸념 어린 장난을 하게 되고 엉뚱한 주목을 받게 된다. – 영화 <칠수와 만수>

연극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영화화된 <칠수와 만수>.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으로, 1988년 개봉해 큰 관심을 끌었다.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두 걸출한 배우가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1980년대의 암울했던 사회상을 풍자했다는 점에서도 새롭게 다가왔던 영화다. 그런데 영화 내용과 무관하게 흥미를 끄는 대목은 극장 간판 화가란 직업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멀티플렉스와 실사 인쇄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극장 간판은 한동안 최고의 영화 홍보수단이었다. 새로운 간판이 걸릴 때면 오가던 사람들은 꼭 한 번씩 올려다보며 새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렇다 보니 간판 화가가 엄청난 대우를 받을 때가 있었다. 극장 간판의 전성기였던 1970년에는 서울 주요 개봉관의 경우 간판 하나에 수백만원부터 1000만원까지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물가를 감안했을 때 간판 화가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때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간판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도 했고, 어른들 역시 선망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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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극장 간판을 그리는 방식은 기존 화가들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원작영화가 있는 만큼 이에 충실하게 주인공을 그려내야 했다. 가장 중요하게 참고하는 것은 영화의 스틸 사진이었다. 먼저 간판 크기의 10분의 1, 또는 20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에 스틸 사진을 참고해 원본을 그린다. 그런 다음 이 원본 그림을 간판만 한 종이에 특수 영사기로 확대해 비춘다. 이 투영된 그림의 선을 따라 연필로 본을 뜨고, 마지막으로 채색을 해서 완성했다. 하지만 화가의 역량에 따라 실제 결과물은 큰 차이가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다소 엉뚱한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당시 극장 간판의 흔적은 지금도 SNS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와 매우 다르게 그려진 배우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래서 ‘간판 화가가 그리면 얼짱도 얼꽝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간판 화가들이 단순히 영화 스틸 사진을 보고 모방하는 사람으로 폄하되며 예술가로는 인정받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판 화가들은 ‘간판장이’로 불렸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장이’라는 명칭은 기술을 가진 전문가라는 의미와 함께 그 직업을 깎아 내리는 뜻도 담겨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간판장이란 용어가 그다지 좋은 어감으로 쓰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간판 화가라는 직업이 한국영화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60~8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숨은 공로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간판 화가의 활동을 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이벤트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몇 년 전 한 전시장에서 개최된 <사라진 화가들의 영화>라는 기획전이 대표적 사례다. 극장 간판을 주제로 실제 간판 그림, 이를 찍은 사진 등을 전시했는데 큰 추억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극장 간판과 간판 화가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겨졌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영화계에, 더 나아가 대중문화계에 미친 영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간판 화가가 매체와의 인터뷰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가슴을 울린다. “사실 영화 간판은 3류 미술이죠. 하지만 3류만이 줄 수 있는 사람 냄새가 있는 거잖아요.” 분명 그들은 우리에게 사람 냄새를 안겨준 대중 예술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