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많이 회자되던 단어가 ‘구조조정’이었습니다. 당시에 엄청난 규모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자발적인 힘이 아니라 위기의 시대가 만든 강제적 ‘개조’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살아남기 힘들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에 뼈를 깎는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피눈물 나는 구조조정으로 ‘위기의 한국호’는 4년도 안 되어 IMF 구제금융국가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치솟던 기업들의 부채비율도 200%대로 내려앉았습니다.

그 이후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특정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해야 하는 ‘생존의 덕목’으로 인식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하고 싶지 않다면, 잘 나갈 때 미리 준비하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확산됐습니다.

그리고 19년 만에 다시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립니다. 10년 주기로 외환위기를 다시 겪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벗어났다고 방심한 탓일까요? 최근 상황은 1997년 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호를 잘 이끌고 나갔던 조선업과 해운업이 붕괴 직전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들 업종의 위기 원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글로벌 시장의 침체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기업의 경영착오가 가장 클 것입니다. 그리고 고질병인 가격덤핑을 경쟁력이라고 잘못 인식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조선업종의 위기는 해양플랜트가 발단이었습니다. 기술력보다는 가격덤핑으로 고도의 플랜트에 뛰어들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기술조건을 이유로 클레임이 들어오면서 어쩔 수 없이 손실 책임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중국의 무서운 추격도 한몫했습니다. 글로벌 경제 침체도 전체 시장을 부진의 늪으로 빠트리면서 한국 조선은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해운업종도 글로벌시장 침체라는 대변수와 용선료를 상투에 잡았다는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채권단들의 모럴해저드도 부실을 키우는 데 한몫했습니다. 이들 기업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할 채권단도 스스로의 자정적 판단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문과 자신들의 눈먼 잇속으로 말도 안 되는 지원을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조선업체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비정상적인 수순을 밟았습니다. 끊임없이 경고등은 켜졌지만 애써 외면한 대가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의 뼈아픈 기억을 망각했을까요. 외환위기 이후 여의도 증권가에는 이런 말이 유행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말을 듣는 기업은 망하고,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융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말을 잘 듣는 금융사들은 모두 문을 닫거나 흡수합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종 책임은 늘 금융사이거나 기업이었습니다. 지시를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을 넘어서면서 위기 이후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위기 사전경고 시스템’은 멈춰버린 듯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위기설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방심 때문인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교적 선방했던 까닭 때문인지 모럴해저드는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웃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위기 불감증에 걸려있던 한국 경제는 또다시 격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년이 다르게 발표되는 정책들을 보면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외양간을 먼저 고치는 게 그나마 시간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 손’에게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