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꺼내기 전에 처한 상황부터 살펴보자. 상황에 대한 인식이라도 비슷해야 대처법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보다 0.4% 증가하는 데 그쳤다. 메르스가 터진 작년 2분기 수준이다. 민간소비는 0.3% 줄었다. 세월호 때인 재작년 2분기 수준이다. 걱정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소비는 위축돼 있고, 수출은 감소세다. 잠재성장률도 갈수록 떨어지는데, 주요 산업의 경쟁력은 신성장동력을 채 확보하기도 전에 추락하고 있다. 청년실업 대란은 해소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가계 부채는 또 다른 빚을 내 돌려막고 있는 식의 악순환에 빠졌다.

눈앞에는 대규모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대기 중이다.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거대기업을 포함한 좀비기업들을 일거에 정리할 경우 대량 실직과 하청기업 연쇄도산이 불가피하다. 지역별로 심각한 경제 침체도 예상된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실탄이 다 떨어져 간다. 재정집행을 초반에 집중시키면서 재정절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 경제는 더욱 심란하다. 유럽과 일본은 이미 마이너스 금리로 혈투를 벌이는 중이고, 중국은 잠재적 재앙으로 언제 터질지 모른다. 한마디로, 안팎이 위기국면이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없이는 경제회생은커녕 현상유지도 어려울 지경이다.

최근의 한국판 양적완화 논쟁도 이런 절박함 속에서 재개됐다. 총선에 패배한 강봉균 새누리당 전 선거대책위원장이 처음 화두를 던졌고, 박근혜 대통령이 재점화시켰다. 그렇다고 하여 총선에 이긴 야당들이 조롱하듯 반응하고 일부 언론이 뜬금없다며 비난하고 나선 것은 국민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해하기가 힘들다.

반대론자들은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청와대 입김으로 중앙은행 독립성을 훼손하는 격이며, 현행 1.5%인 기준금리부터 제로(0%)까지 떨어뜨리고 나서 양적 완화를 거론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는 효과가 없었다. 당장 금리 추가 인하를 하더라도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시장에 줄 수가 없다. 더구나 기준금리는 그 효과가 전방위적이다. 타깃이 분명한 일반 경제정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상 못한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얼마 전 우리는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가 예기치 못한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일본정부를 공황 속에 빠뜨린 사실을 생생히 목도한 바 있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주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산업금융채권(산금채)과 주택저당증권(MBS)을 인수하는 방식이다. 내용상 구조조정이라는 특수 목적 하에 선별적으로 추진하는 양적 완화여서 무차별적으로 돈을 푸는 일본의 ‘묻지마’식 양적 완화와 다르다.

그러나 한국판 양적완화는 아직 방법이 없는 상태다. 한국은행은 한은법상 정부보증을 받지 않은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매입할 수가 없다. 한은법 개정이 필요하다. 한국은행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출자하는 것도 산은법 개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법 개정은 결코 쉽지 않다.

산업은행을 단일 채널로 하여 기업 구조조정에 나설 경우 또다시 관치금융 논란이 벌어질 우려가 있다. 가계부채도 이번 기회에 해결의 모멘텀을 찾아야 할 텐데 아직 명쾌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 상황이 절박하다.

4월 21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에게 기자 여럿이 “그간의 ECB 양적완화정책이 큰 효과가 없었다”며 비판성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마리오 총재는 즉각 “만약 부양책이 없었다면 유로존 성장률과 인플레율은 지금보다 더 나빴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지금 한국 경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은 상황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