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드라마 덕에 국제평화유지군 사업(PKO)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평화유지군 사업은 분쟁 중인 국가에 국제기구에 소속된 가맹국들이 중재나 감시를 목적으로 파병한 임무를 말한다. 이 평화 유지 사업은 다양한 국제기구와 단체에서 실시하고 있으나 가장 권위를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곳은 당연히 국제연합(United Nations) 국제평화유지국(Department of Peacekeeping Operations) 산하에 설치된 국제평화유지군이다. 이들은 주로 분쟁이 해소됐거나 잠재적인 분쟁 가능 지역에 파병되어 신뢰 회복 사업, 선거 지원, 치안 유지, 경제 및 사회 개발 지원 등을 실시한다. ‘파란 헬멧’으로 상징되는 이들은 상설군대가 아니라 각 회원국의 참여를 통해 임무를 실시하며, 분쟁을 해결하고 중재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통상적으로 자위(自衛)를 목적으로 한 최소한의 교전권만 실시한다. 하지만 선한 의도와 목적과 달리 복잡한 국제정치와 국가 간 역학 구조, 현실적 무력 사용에 대한 한계 때문에 항상 평화유지 사업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평화유지군의 역사

원래 이 PKO는 국제연합의 창설 시기부터 구상됐던 조직이 아니었다. 이젠 사실상 사문화가 되어버린 국제연합 헌장 제7장 43~47조에 보면 군사 참모 위원회(Military Staff Committee) 설치에 대한 문구가 등장한다. 원래 UN은 태생부터 추축국(Axis Powers)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연합군(Allied Forces)에 근거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유사 시 인류를 위협할 또 다른 상황에 맞설 상설 국제연합군의 창설을 추진했다. 따라서 초창기 계획상으로는 이 ‘군사참모위원회’를 안전보장이사회 산하에 설치하고, 각국 참모총장이 이 위원회에 소속되며, UN이 필요로 하면 긴급 병력을 언제든 급파하도록 하는 준 상설화된 군 조직을 설치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랐다. 당장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은 1950년에 터진 6‧25 전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 첫날 소련이 회의장에서 나가버린 덕에 UN군 구성에는 성공했으나, 실수를 깨달은 소련은 그 이후 회의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거부권(비토)을 행사해 의결 진행을 방해했다. 게다가 곧이어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유진영과 공산권 간에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이런 대규모의 다국적 연합군의 결성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특히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자신의 진영에 불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양 진영이 번갈아가며 비토권을 썼기 때문에 이 ‘군사참모위원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고, 상설화된 ‘UN군’은 두 번 다시 구성될 수 없게 됐다.

실질적인 오늘날의 ‘평화유지군 사업’과 개념이 맞닿은 활동은 이미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8년도에 실시됐다. 당시 갓 창설된 국제연합은 UN 결의안에 의거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분할 독립하는 과정에서 양 세력의 충돌을 막기 위해 파견된 ‘국제연합 정전감시단(UNTSO, United Nations Truce Supervision Organizations)’을 전개했고, 이들의 임무는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이어지고 있다. 바로 그 뒤를 이어 실시된 평화 유지 사업은 영국령 식민지에서 분할 독립하기로 결정한 인도와 파키스탄을 감시하기 위한 국제연합 인도-파키스탄 군사감시단 (UNMOGIP, United Nations Military Observation Group in India-Pakistan) 활동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면서 어차피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대등하게 지분을 가진 UN은 정치적인 국가 간 전쟁엔 개입하기가 힘들었지만, 양 진영의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적은 아프리카 내의 내전이나 중동 분쟁 등에서는 평화유지군의 존재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UN 국제평화유지군은 198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냉전의 종식으로 본격화 된 평화유지사업과 그 명암

PKO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사실 공산 진영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난 1991년 이후부터다. 자유-공산의 대결이 종식되면서 전 세계의 국지 분쟁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UNSC)는 대대적인 평화유지군 사업을 시작했고, 1992년에는 늘어난 임무에 맞게 국제평화유지국(DPKO)을 설치했다. 이때부터 엘살바도르, 모잠비크, 콩고, 소말리아, 캄보디아, 과테말라, 모잠비크, 나미비아 등지에서 PKO 활동이 실시됐고, 대부분 긍정적인 결과를 내면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냉전 이후 UN 평화유지군은 총 4개 대륙에서 16개 평화유지군 활동을 소화했다.

국제평화유지군 활동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이 따른다. 평화유지군은 쌍방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을 견지해야 한다. 무력 사용은 각 임무단의 위임 사항(Mandate)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 늘어나는 민간인 보호 또는 ‘자위적인’ 반격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때문에 평화유지 활동에는 제약이 많다. 일단 이들은 싸움을 ‘말리러’ 간 것이지 한 세력을 제거하러 간 것이 아니므로, 분쟁 당사자들이 이들을 먼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또한 이러한 기계적인 중립은 분쟁당사자들 입장에서 상대 진영을 돕는 것으로 오해받을 여지도 있다. 이런 활동상의 제약 외에도 여러 다양한 문제 때문에 평화유지 사업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PKO의 주요 병력 공여국들은 빈곤한 개도국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대부분 보병 위주의 파병을 하고 있고 빈약한 장비, 낮은 전문성, 문란한 군기 등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는다. 기동 장비, 무인기 등 정찰 감시 장비 등은 선진국에 의존하고 있다. 임무단 사령관의 지휘 통제권한도 문제가 되는데 많은 참여국들이 자국의 지침에 따르고 있어 작전에 선택적으로 참여하거나 작전에서 빠지게 되어도 통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지키기 어려운 평화 – 실패한 PKO 사업의 상처

PKO 사상 최악의 실패로 꼽는 사건은 1993년 르완다 내전에 대한 평화유지군 사업(UNAMIR, UN Assistance Mission to Rwanda)이다.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식민지 시절 소수의 투치(Tutsi)족이 다수의 후투(Hutu)족을 지배하던 구조였는데,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뒤에도 투치 족의 카이반다(Kayibanda) 대통령이 후투족에 대한 압제를 계속하자 두 민족 사이에 갈등이 계속해서 누적됐다. 일단은 후투족의 1973년 쿠데타로 하브자리마나(Habyarimana) 장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잠시 민족 갈등은 소강상태가 됐으나, 1990년부터 투치족의 르완다 국민전선(RPF)이 궐기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내전이 장기간 지속되자 UN은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정하고 벨기에, 방글라데시, 가나, 튀니지군으로 구성된 PKO 임무를 시작해 하브자리마나 대통령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 과정을 돕고 내전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오히려 94년경 하브자리마나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격추당하면서 다수인 후투족의 소수 투치 족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됐다. 4월 9일을 시작으로 약 100일간 도합 180만명 이상이 학살된 이 내전에서 UN이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4월 12일에는 총리를 보호하던 벨기에 병사 약 열 명이 전사하자 벨기에 정부는 이 난국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이에 UNAMIR 사령관이던 캐나다군의 로메오 달레어(Romeo Dallaire) 장군은 오히려 병력이 증파되어야지 철수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요청했으나, UN 안보리는 르완다 정황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적인 분위기가 됐으므로 철군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실 이 결정은 벨기에의 로비뿐 아니라 바로 직전에 끔찍한 재앙을 야기했던 소말리아 PKO(블랙호크다운)의 영향도 컸다. 결국 UNAMIR의 대다수를 이루던 벨기에가 빠지고 남은 평화유지군은 최선을 다해 투치족 보호를 시도했지만 경무장의 평화유지군이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 사건 외에도 훗날 서아프리카, 캄보디아 등지의 PKO 활동 중 일부 파병 인원이 인신매매나 성매매에 연루되면서 PKO 활동 자체에 오명을 안기기도 했다.

 

국제기구와 대한민국의 PKO 활동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UN 외에도 다양한 국제기구나 군사동맹들이 평화유지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냉전 종식 후 공산블럭이 사라져 사실상 ‘적’이 없어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같은 경우도 코소보 전쟁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평화유지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연합(AU)도 UN과 더불어 아프리카 평화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최근 추세는 국가 간 전쟁이 크게 줄어든 반면 내전은 늘어난 양상인데, 냉전의 종식과 함께 존재 목표가 변화하게 된 연합기구들이 전 세계적 평화유지사업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상황이다.

대한민국은 UN 가입(1991년) 직후인 1993년부터 소말리아에 공병부대(상록수 부대)를 파병하면서 평화유지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에는 서부 사하라(의무부대), 1999년에는 갓 독립한 동티모르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했으며 앙골라, 레바논(동명부대), 아이티(단비부대), 남 수단(한빛부대) 등이 PKO 사업에 참여해 활동해왔다. 법적 측면에서는 PKO와 살짝 다르지만 잘 알려졌다시피 다국적군의 일환으로 소말리아~아덴만 지역의 해적을 척결하고 통행 선박을 보호하기 위한 ‘청해부대’도 2009년부터 활약해오고 있고 ‘군사 한류’를 일으킨 ‘아크부대’가 2011년부터 국방교류협력 차원에서 UAE의 특수부대를 교육훈련 시키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위상과 국력이 커감에 따라 세계 평화를 위한 이러한 기여의 범위도 함께 넓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