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탁사가 최초로 재건축정비사업 단독시행자가 됐다. 안양시 호계동 주택재건축사업 조감도. 사진=코람코자산신탁 제공.

조합 분쟁과 사업성 부진으로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소규모 재건축 재개발 시장이 본격 활기를 띨 전망이다.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정법) 개정으로 지난 3월부터 부동산 신탁회사도 단독시행사로 정비사업(토지 등 소유자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사업을 추진하는 형태) 참여가 허용됨에 따라 대형 건설사들이 수익성 약화를 이유로 기피했던 지방 중소도시의 소규모 재건축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부동산 신탁회사들은 재건축 재개발 분양 전담팀을 꾸리거나 단독시행을 맡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규모 사업장 조합들이 자금력이 튼튼한 부동산 신탁회사을 선호하는 배경은 사업비 마련에서 시공사 선정, 개발이익 보장까지 안전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행된지 한달 남짓 밖에 안됐지만 소규모 정비대상 사업장의 분양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정비사업장의 부동산 신탁회사 단독시행사 참여에 대해 시공사인 건설업체들도 환영하는 분위기다. 시공사 입장에서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이 없이 기성불(공사의 진척도에 따라 공사비를 받는 것)로 공사비를 받을 수 있고 공사지연에 따른 건자재 가격 등의 변동성 부담이 줄기 때문.

최근 코람코자산신탁이 신탁사 최초로 재건축 단독시행을 맡게 됐다. 신탁업계 최초로 안양시 호계동 일대 재건축정비사업을 수주한 것. 안양 성광·호계·신라아파트 등 총 104가구를 203가구로 재건축하는 것으로, 오는 6월 착공 예정이다.

신탁업계 전문가는 “코람코 외 신탁사들이 정비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물밑작업이 한창”이라며 “정비사업 전담팀을 이미 만들고 사업장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죽어가던 사업장, 신탁사가 되살린다

부동산 신탁사는 사업성이 좋은 곳 보다 대형 건설사들이 수지타산 상 진입하지 않는 틈새시장인 지방 중소도시의 소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차입형 토지신탁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신탁사는 땅 주인이나 건설사(시공사) 등이 맡긴 부동산을 개발·관리해 이익을 돌려주고, 건축이나 분양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건축과 분양을 신탁대행해 토지개발에 따른 수익을 돌려준다. 대신 신탁사는 사업비의 일정 부분을 신탁 대행 수수료로 받는다.

신탁사는 주로 여러가지 문제로 진행속도가 느린 사업장에 투입돼 정비사업을 투명하게 만들고 분양관리 및 준공을 책임진다. 사업성이 낮은 정비사업은 조합원 비리 등 각종 사고로 사업진척이 느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탁사의 진출은 해결사 역할도 하고 있다. 또 신탁사에 사업을 맡겨 신탁등기가 되면 금융권의 압류가 불가능해지는 등 리스크를 사전에 대비할 수 있고,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기 때문에 사업관리도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다. 

영세한 조합이 자본력과 개발 역량이 탄탄한 신탁사에 토지개발을 위임함으로써 사업비 부담을 덜 수 있다. 신탁사가 사업비의 총 70%를 조달할 수 있어서다. 특히 서울의 경우 공공관리 때문에 조합이 사업시행인가 이전에는 시공사 선정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조합설립 이후 돈을 빨리 지원받을 수 있는 신탁사와 접촉하게 된다. 

한국토지신탁 관계자는 “시행사가 자금난에 부딪혀 시공사와 갈등을 겪거나 부도가 날 경우에도 PF자금을 대신 갚아주고 분양을 재개하는 데 도움을 준다"며 “정비사업분야에서 올해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조합 동의 75%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정비사업이 신탁사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거란 것에서 큰 이견은 없다. 그러나 토지 등 소유자의 75% 동의를 받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게 건설업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사업이 지지부진한 사업장은 조합 동의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는 지난해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하면서 재개발·재건축 조합원의 75%(조합 설립 동의율) 이상이 동의하면, 신탁업자를 사업 시행자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자금조달이 잘되기 때문에 조합원 동의가 높을 거란 예상이 나오지만, 사실상 강남지역 재건축 조합원들은 사업성이 좋은데 굳이 신탁사에 시행을 맡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시공사 선정 등 사업 주도권을 신탁사에게 넘겨 주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존에 계약돼있는 정비업체도 업무 중복으로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한 신탁업계 관계자는 “신탁사가 소규모 정비사업에 활력을 줄 수 있는건 사실이나 시장자체가 크지 않고, 그런 사업에서 4분의 3에 해당하는 주민 동의율을 맞출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시간을 두고 업계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사업 추진을 위한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신탁사가 주택경기 흐름을 잘 타는 것도 리스크 요인으로 꼽혔다. 한국기업평가 윤민수 연구원은 '부동산신탁업의 리스크요인 및 대응방향' 보고서를 통해 "지난 수년간 부동산신탁사는 업체간 경쟁 심화로 비토지신탁의 수익성이 저하되면서 고수익·고위험 성격의 토지신탁에 사업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라며 "토지신탁 관련 리스크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공급과잉에 기인한 주택경기의 하락은 수익기반 축소 및 비경상적 손실에 따른 자본완충력 저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