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의 첫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동인과 서인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조전랑은 문무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직책이다. 이 자리는 선비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청요직(淸要職)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이들은 품계는 낮아도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기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는 자리였다. 그런데 1572년(선조 5) 이조정랑 오건이 자리를 뜨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는데, 당시 이조참의인 심의겸이 예전에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드나든 것을 문제 삼아 반대했다. 그러나 심의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이조전랑이 되었고 훗날 반격에 나섰다.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거론되자 반대하며 이발을 그 자리에 앉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에 시작된 싸움은 심의겸을 지지하는 선배 사림들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 사림들이 서로 대립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리고 율곡 이이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갈등만 더욱 심화되어 결국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동인으로,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인과 서인이라는 계파의 칭호는 동인의 거두인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릉동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붙여진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다. 동쪽에 사니 동인, 서쪽에 사니 서인이라 부르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 계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물을 보면 그저 단순히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다. 동인에는 주로 이황과 조식의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기호학파가 뭉쳤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조선을 망국으로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계파정치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계파는 동·서로 나뉜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선조 말로 가면서 서인인 송강 정철이 왕에게 세자책봉을 건의한 것을 문제 삼아 서인을 탄핵하던 동인은 정철을 귀양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짓자는 남인과 정철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북인으로 나뉘는데, 남인은 이황계열이고 북인은 조식계열이었다. 그리고 북인은 다시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를 그대로 왕으로 삼아야 한다는 대북과 적손인 영창대군이 생산되었으니 세자를 바꿔야 한다는 소북으로 나뉜다. 그리고 광해임금이 즉위하자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문제를 가지고 골북과 육북, 중북으로 나뉘는 등 시시각각으로 대립되는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계파로 나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왕의 비위를 누가, 어떻게 맞출 것이냐는 것과 어느 쪽으로 줄을 대야 왕권과 가까이 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느냐 하는 눈치 보기 싸움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작 존재해야 할 백성들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고 백성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권력만을 추종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동인이 권력을 잡고 이렇게 계파의 분열을 이어가는 중에 권력에서 밀려난 서인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권력을 탈환해야 했다. 서인들은 자신들의 권력탈환을 위해, 백성을 위한 정치가 실종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개혁을 주도하려는 광해임금을 폭군으로 몰아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광해임금은 당시의 계파정치로 인한 폐해 때문에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왕이다. 세자책봉 문제로 인해 신성군과 자신을 가운데 놓고 세력다툼을 하는 계파정치의 폐단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나라의 위험을 타파해 나갈 방책을 세우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는커녕, 각 계파 간의 이해득실과 자신들이 추천하는 사람을 장군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전공이 확실한 장군도 모함하는 등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으로 어진이 한양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하면서, 장차 선조는 요동으로 행할지도 모르니 본국에는 왕세자라도 남아야하기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위해서 피난길에 평양에서 부랴부랴 광해를 세자로 책봉했음에도, 영창대군이 생산되자 핏덩이 같은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대군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일어서는 계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임진왜란의 전란 중에는 서로 목숨을 구하려 어진을 따라 피난하기만을 자처하던 대신들과는 다르게, 세자 광해는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의 맹산·양덕, 황해도의 곡산, 강원도 이천과 황해도는 물론 다시 평안도 성천과 영변으로 가는 등 전국을 떠돌며 분조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