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계파 간의 공천학살은 마치 조선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과 사화를 보는 것 같아 끔찍하기조차 하다. 물론 그 시대에는 권력을 잃는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했고 지금은 권좌를 비껴가더라도 모셔가는 또 다른 곳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을 당한 당사자 역시 자신을 모셔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니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큰 문제가 될 것 없다고 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정치현실을 보며 살아야 하는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지를 정치하는 이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줄을 잘 서고, 그 줄에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박수를 치는 예스맨까지 되어야 한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나서서 자신이 속한 정당이 책정한 정책에 대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제거되기 일쑤다. 백성들을 위한 쓴 소리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최고 실력자의 입맛에 맞는 발언을 하는 것이 자신의 자리 보존에는 훨씬 이롭다. 같은 정당에서 내놓는 안도 백성들의 현실을 잘못 파악하여 실수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지적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서 바르게 잡아가야 하는 것이 정말로 백성들을 위한 것인데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그 자체가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럴수록 백성들은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붕당을 만들어 권력투쟁에서 이겨야, 자기 권력을 지킴으로써 가문을 지킨다는 핑계 하에 백성들의 삶은 나 몰라라 하면서 파당정치에 골몰하던 조선시대의 계파정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가 계파 간의 밥그릇싸움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계파정치가 일어났으며 어떻게 성장했고 그 교훈으로는 무엇을 남겼을까?

계파의 의미를 굳이 어느 편을 드느냐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의 시작과 함께 계파정치가 생겼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국가에서의 왕국이라는 것은 각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어느 왕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 무력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무력으로 침공해오는 신흥세력에 굴복한 것을 계파라고하기에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고대국가에서 누구의 편을 드느냐는 계파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초에는 어땠을까? 물론 신라 6두품을 중심으로 한 경주파가 고려의 조정을 장악했으니 계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진국(발해)의 유민들이 자신들이 닦아 놓은 텃밭 같은 권력의 틈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은 까닭에 북방 동포들을 배척했고, 그런 정신은 훗날 묘청의 난과 홍경래의 난 등으로 이어지는 뿌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고려 말에는 신흥사대부의 등장으로 인한 계파가 형성되었던 것도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흥사대부라는 계급이 기존의 훈구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 나름대로 계파가 필요했을 것이고, 신흥사대부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훈구세력 역시 결집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에 의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역사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계파정치의 가장 최고봉을 꼽으라고 한다면 조선왕조 중기 이후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종말이 어쨌는가를 묻는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마디로 ‘자멸’이다. 그것도 우리 민족에 의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던 이제까지의 왕조의 멸망과는 다르게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병합되는 치욕을 당하고 만 엄청난 자멸이다. 조선왕조 500년이 종말을 고한 가장 큰 원인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먼저 손꼽는 것이 바로 계파정치다. 우리가 흔히 당쟁이나 사화라고 표현하는 사건들이 사실은 계파정치에 의한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계파정치의 태동은 선조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선조가 처음으로 사림을 등용한 것은 아니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그동안 훈구세력을 견제해 주던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처형되었으므로 훈구세력을 견제할 마땅한 세력이 없어지자 신진 사림들을 등용했다. 그때 등용된 사림들은 점차 입지를 넓혀 갔다. 그리고 사초를 건드리는 등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시대에 사림들의 움직임은 잠시 주춤하는 것 같았지만,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개혁의 중심에 서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