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이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있었다. 작품에서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은 어려서 받은 학대의 기억으로 고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나무가 되어간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이처럼 채식주의자는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거나 까다로운 성미를 가진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양한 이유와 계기로 조금은 남다른 ‘고집’을 갖게 된 보통의 사람들에 더 가깝다.

 

#아일랜드 출신의 심리상담가 로라 모란 씨(29)는 5년 전 한국에 온 뒤 불교에 심취해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가 됐다. 지금까지 건강상의 이로움과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 모두에 만족하면서 채식을 고수하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외식을 할 때는 ‘해피카우’ 앱(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채식 레스토랑을 찾는다. 그는 한국인들이 채식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단순한 다이어트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

#서울에 사는 전미진 씨(26)는 체중조절을 위해 채식을 시작해 현재는 관련 블로그와 모임을 운영하는 등 적극적인 채식 생활 중이다. 회식이나 다른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고기나 생선을 먹기도 한다. 엄격한 비건이라기보다 플렉서블 채식주의자인 셈. 채식 관련 모임에서 정보와 나아가 감정까지 공유할 수 있어 즐겁다.

채식주의자들은 식단의 허용성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육류는 물론 유제품, 벌꿀까지 먹지 않는 비건(Vegan) ▲유제품은 먹되 달걀은 먹지 않는 락토(Lacto) ▲ 유제품은 먹지 않고 달걀을 먹는 오보(Ovo) ▲유제품과 달걀을 먹는 락토-오보(Lacto-Ovo) ▲유제품과 달걀, 생선까지 먹는 페스코(Pesco) ▲가금류 등 흰 살코기를 먹는 폴로(Pollo)) ▲가끔은 육식을 먹는 플렉서블(Flexible)이다. 이 외에도 열매만 먹는 열매주의자(Fruitarian)도 있다. 가장 엄격한 채식주의자 그룹인 비건은 전체 채식 인구의 10% 정도가 된다.

 

한국채식연합은 국내 채식 인구가 인구의 약 2%, 즉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조류독감과 구제역 등 음식 매개 전염병 공포, 웰빙 열풍, 환경에 대한 관심 증가로 채식주의 인구는 계속해 늘고 있다. 이효리, 이하늬, 한가인, 김제동 등 인기 연예인이 채식에 동참했음을 선언한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은 몇 년 전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커진 상황이다.

현재 ‘다음’ 카페 중 크고 작은 채식 동호회는 200여개에 이르고 한국채식연합의 회원은 1만5000명이 넘는다. 이곳에서는 종로의 사찰음식점이나 홍대의 베지테리언 카페에서의 소소한 모임 소식과 채식 조리법, 건강 관리법, 이벤트 등 다양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정보가 공유된다. 한남동 베이킹 스튜디오 ‘운스(Oons)’는 디저트를 즐기는 여성 채식주의자들의 아지트다. 버터나 우유 대신 코코넛 오일이나 두유를 쓰는 순식물 성분 빵과 디저트를 개발하고 소규모로 판매도 해 아토피나 당뇨 등의 지병으로 식습관을 개선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매월 두 차례 열리는 도시농부 장터 ‘마르쉐’에는 채식주의자들과 유기농 먹거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 지난 13일 혜화 마로니에 공연에서 있었던 마르쉐에도 30팀이 넘는 도시농부들과 그 농산물로 만든 요리팀, 수공예팀, 공연팀이 모여 장터를 열었다. 여기에는 동물성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븐도 쓰지 않는 ‘로푸드’ 음식, 비건을 위한 파스타 소스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타적 소비자의 습격

일찍이 비인도적 축산과 동물 보호가 주목받은 서구의 경우 채식주의는 이미 대중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슈바이처, 간디, 레오나르도 다빈치, 리처드 기어, 데미 무어, 브래드 피트 등 많은 유명인도 채식주의자였다. ‘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의 딸이자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는 채식주의와 동물 보호를 알리기 위해 가죽이나 퍼를 쓰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미국 내 채식주의자는 전체 인구의 약 3%로 10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채식 인구가 최대 7%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의 경우 독일에는 750만명, 이탈리아는 570만명,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360만명과 130만명의 채식주의자가 있다. 가까운 나라인 대만의 경우 종교와 광우병의 영향으로 채식 인구는 전 인구의 10% 이상에 달해 약 250만명이 넘는다. 때문에 대만에는 관련 산업이 발달해 있다.

외국인 채식주의 손님을 위해 항공사들은 발 빠르게 채식 기내식을 준비했다. 아시아나는 회교도식, 힌두식 등과 함께 채식주의자 메뉴를 특별 기내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대한항공도 서양 채식, 동양 채식, 인도 채식, 생야채식 등 다양한 채식 메뉴와 조절식을 선보였다.

최근 중국, 프랑스, 미국 등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SPC그룹의 간판 브랜드 ‘파리바게뜨'는 미국 동부 지역에서는 3종의 비건 머핀을 따로 준비했다. 수요가 크지는 않지만 비건 고객들이 반가워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롯데제과는 지난해 인도 북부 뉴델리에 초코파이 공장을 짓고, 채식주의자가 많은 현지 상황을 고려해 식물성 초코파이를 내놨다. ‘원조’ 초코파이 제조사 오리온도 마시멜로 성분을 해조류에서 추출한 식물성 초코파이를 인도 시장에 출시한 바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꼽은 미국 수출 유망품목에는 치킨맛, 쇠고기맛 등의 식물성 단백질 식품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규모가 작은 까닭인지 국내 비건 시장을 잡고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기업이 드물다. 농심의 채식 라면 ‘야채라면’의 매출은 지난해 기준 연간 약 20억원으로 농심의 전체 라면 매출에 비교했을 때 약 0.2%를 차지했다. 농심 홍보팀은 “수익성보다는 소수 소비자를 위한 ‘특별한 제품’이라는 생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전체 매출에 비해 미미한 야채라면을 생산하는 명분을 설명했다. 경쟁 업체인 삼양식품은 채식 라면을 출시한 적이 없다.

▲ 출처=농심

서구 국가에서는 대부분의 식당은 물론 학교나 회사 식당에서도 채식주의자용 메뉴가 따로 있다. 국내 최대 급식업체인 삼성 웰스토리는 다양한 건강식과 할랄식 등을 제공하지만 채식주의자 전용 메뉴는 갖고 있지 않다. 현대그린푸드도 전용 메뉴는 제공한 적이 없다. 다만 아워홈이 수년 전 교직원 중 불교 승려가 많은 동국대의 급식을 완전 채식 식단으로 제공한 적이 있다. 아워홈 관계자는 “이는 고객의 요청으로 인한 특별한 경우였지 상시적으로 채식 전용 메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육류 소비를 줄이고 식물성 대체 식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세계적 트렌드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매일유업은 지난해 4월 100% 아몬드로 만든 식물성 음료 ‘아몬드 브리즈’를 국내 출시했다. 시장조사업체인 ‘데이터모니터 컨슈머’에 따르면 우유를 대체하는 식물성 음료 시장의 규모는 2009년 51억7800만달러에서 2014년 81억5000만달러로 증가했다.

매일유업의 아몬드 브리즈 마케팅 담당자는 “아직 시장 규모는 작지만 체중 관리에 예민한 2, 30대 여성이 주 타깃으로 채식주의자들과 우유 불내증을 가진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전했다. 매일유업 측은 "다른 유제품 제조사와 마찬가지로 식물성 조제분유도 시장에 내놓고 있는데 실제로 분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신생아들을 위한 것이지 국내에서 채식주의 부모가 이를 유아식은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도 채식주의를 이유로 아기에게 콩으로 만든 유아식을 먹이는 데 대해 논란이 있다.

채식 전문 제조사는 중소업체에 국한된다. 올해 17년 된 채식 전문 제조사 베지푸드는 콩고기 수입사로 시작해 콩고기, 밀고기, 곤약 등 채식 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다. 관계자는 약 25%의 매출이 온라인 쇼핑몰과 소셜 커머스 사이트를 통한 직접 판매로 창출되고 급식이나 채식 식당에 납품한다고 한다. 그는 경기를 타지 않는 품목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지만 최근 몇 년간 정체된 경향은 있다고 전했다.

 

채식주의 화장대

비건 전용 제품은 먹거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물권과 환경 보호에 대한 신념을 가진 비건들 외에도 피부 건강에 적합하고 친환경적인 성분을 중시하는 일반 소비자들도 비건 화장품을 찾고 있다. 최근에는 달팽이 크림과 유사한 효능의 참마를 원료로 한 화장품이 나와 업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대표적인 순식물성 화장품 ‘이솝’은 동물성 재료와 방부제, 인위적인 향 등을 일체 함유하지 않고 식물 성분으로 대체했지만 상당한 수준의 제품력을 지녔다. 때문에 유료 광고나 연예인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지 않고도 전 세계 비건들은 물론 비건이 아닌 소비자 층에도 인기가 높다.

▲ 출처=러쉬, 이솝, 이코노믹리뷰

글로벌 뷰티 브랜드인 ‘러쉬’는 생산하는 제품의 83%가 완전한 식물선 비건 제품으로 영국 비건협회의 인증을 받았다. 러쉬는 '비건은 단순한 채식이 아니라 의류, 화장품 등 생활 전면에서 가능한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를 배제하려는 삶의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을 이해하는 고객의 브랜드 충성도도 높은 편이다. 러쉬코리아의 윤예진 주임은 “비건 제품에는 영국 비건협회 인증 마크가 표기돼 있다. 언젠가 재인증기간 중에 한 고객이 ‘왜 마크가 없어졌느냐’고 물어 설명을 했더니 ‘인증 이후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는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화장품에는 의외로 많은 동물성 성분이 들어간다. 유명 브랜드의 립밤에 들어가는 라놀린 성분은 양털에서 추출한 성분이며 콜라겐은 어류나 돼지껍질에서 케러틴 성분은 동물의 뼈나 깃털에서 추출된다. 밍크나 악어오일 등 불법 포획 가능성이 있는 재료도 포함된다. ‘아로마티카’의 김영균 대표는 “한국의 성인이 하루 평균 10종의 화장품을 사용한다”며 “사람이 먹을 수도 있는 화장품은 최대한 안전한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로마티카 창업 당시부터 동물성 재료를 100% 배제했다.

 

고기는 유죄인가?

전 세계 13억이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매년 10억마리의 소가 전체 곡식 생산량의 1/3을 먹어치우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의 말처럼 인간의 과도한 육식은 저주가 돼 돌아왔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 활동에 의한 모든 이산화탄소 배출량 중 축산업의 비중이 운송업보다 높은 18%에 이른다. 때문에 유엔은 채식주의의 유행으로 인한 육류 소비 절감을 반가워하고 있다.

동물 권리 인식이 높은 이들은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로 보아 육식을 금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현대의 공장식 축산업 방식을 이용한 비인도적인 방식의 사육과 도축은 다른 문제가 된다. 여기에 각종 호르몬제와 곡물사료, 항생제의 상용화는 인체에도 큰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다.

채식을 부작용이 없는 만성질환의 치료법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약이나 시술로 해결되지 않는 비만, 고혈압, 당뇨병, 심혈관질환 등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식단을 바꾼 것이다. 채식운동을 하는 의료인 단체 ‘베지닥터’는 채식만으로도 건강을 유지하고 만성질환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쌀과 콩류 등도 일정 이상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어 채식으로 우려하는 채식으로 인한 영양 불균형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채식만 고집할 경우 영양 결핍은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경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축산학과 주선태 교수는 저서에서 “고기는 다른 식품으로는 대체되기 힘들어 꼭 먹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인이 1년 동안 고기를 먹는 양은 미국인의 1/4 수준이라고 지적하면서 가장 건강한 식이습관은 고기를 먹는 채식이라고 전했다. 축산업계도 채식주의의 확대는 심각한 식육제품 소비 위축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