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⑥

▲ 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앞서 다섯 편에 걸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둘러싼 의문점들을 살펴봤다. 이제 필자의 작가적 견해를 떠나 팩트(Fact)에 입각해 다른 방향에서 알아보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특별경호원이자 건축가였던 러시아인 세레딘 사바틴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을 떠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그리고 훗날 공개된 러시아 문서 중에 1910년 6월 고종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신청을 한 것이 있다. 고종은 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신청을 했을까?

사바틴도 그곳으로 갔고, 고종황제도 같은 장소로 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그냥 우연으로만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래 이름이 한자로 ‘해삼위(海參崴)’로 불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영토였으니 고종은 그리로 망명신청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사바틴마저 그곳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을미난동 발생 4개월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을 요청했던 명성황후 사건과 연관이 없는 것이라고 과연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블라디보스토크는 조선에서 가까운 곳이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뱃길로 가기에도 안성맞춤이라는 지역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고종이 명성황후의 국상을 무려 2년이나 미루고 2년 2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고, 자리가 빈 황후 간택을 끝내 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으로만 넘기기에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후 자리가 비면 즉시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이 조선의 전통적 관례였다. 황후를 폐비하고도 새로 간택하는 것이 관례이건만 더더욱 황후가 붕어(崩御)했는데도 간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성황후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고종은 알고 있었기에 국상을 치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모의 자리도 남들이 보기에는 빈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필자의 논술이 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작가적 추론이 곁들여져서 믿기 어렵다면 왕조실록을 보면 믿음이 갈 것이다. 그 사건에 관한 왕조실록을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청(淸) 광서(光緖) 21년) 8월 20일(무자) 1번째 기사

=묘시(卯時)에 왕후(王后)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후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청(淸) 광서(光緖) 21년) 8월 22일(경인) 1번째 기사

=“왕후(王后) 민씨(閔氏)가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년(1882)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짐이 할 수 없이 짐의 가문의 고사(故事)를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청(淸)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 기사

=“짐(朕)은 왕태자(王太子)의 정성과 효성, 정리(情理)를 고려하여 폐서인(廢庶人) 민씨(閔氏)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하노라.”

 

왕후께서 붕서하신 것을 훗날 기록하였다고 분명하게 적고 있다. 그 당시에는 몰라서 이틀 후에 폐서인했다가 다시 빈 칭호를 내리고 그 후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날 시해당하지 않으셨기에 사라진 것으로 간주하고 우왕좌왕한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어디론가 피신해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고종이 폐서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왜 대한제국 설립 당시에 명성황후로 추존을 했다는 말인가? 명성황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고종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정말 좋은 방법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불태우는 것을 목격한 환관이 여인의 옷을 봤고 그때 타다 만 뼈를 숨겨가서 그것으로 훗날 국장을 치렀다고도 한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훈련대 간부가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 밑에 매장했다가 훗날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관에 넣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되었던 그날 불로 소실한 시신으로 장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양주에 있는 홍·유릉에서 홍릉에 있는 그날의 명성황후 뼈에 남아 있는 DNA를 채취하고 유릉에 있는 순종황제 시신에서 DNA를 채취하여 대조하여, 두 분은 모자지간이니 일치하면 그날 황후께서 시해당하신 것이 맞는 것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시해당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글머리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지 필자가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는 장편소설을 썼다는 이유가 아니다. 국모가 일본 낭인배들에게 잔혹하게 시해당했다는 것도 모자라 치욕을 입었다고 공공연히 떠벌리는 무리들에게 민족 자존심을 지킬 가치가 그렇게도 없는 것인지 울분을 토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