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최태원 회장 VS STX그룹 강덕수 회장’
하이닉스 인수전의 막이 올랐다. 2파전이다. 석유와 통신, 조선과 해운의 다른 사업을 갖고 있는 그룹 간의 맞대결. 선봉장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강덕수 STX그룹 회장이 나섰다. 전략기획가와 인수합병(M&A)전문가, 오너 2세 경영인 회장과 회사원 출신 회장의 경쟁구도다. 하이닉스는 과연 누구의 품에 안기게 될까.


7월 8일 CS증권 서울지점(소공동).
오후 3시 20분. 하이닉스 채권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수의향서 제출 마감시간인 4시까지 40분이 남았지만 인수의향서를 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1분, 또 1분. 이번에도 매각에 실패하면 하이닉스는 주인 없는 회사로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십년 이상을 지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다.

오후 3시 35분. “준비해, 준비. 어서.” 갑작스런 3명의 등장에 채권단이 분주해졌다. “여기 있습니다.” 무리를 이끌던 한 사람이 서류봉투를 제출했다. SK그룹의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러 온 류영상 글로벌MNO 전략팀장이다. “됐다, 됐어.” 채권단 관계자들 사이에서 안도의 소리가 들린다. 재계 3위 SK그룹이 나선 만큼 특별히 신경 쓸 게 없다는 눈치다.

오후 3시 53분. 채권단이 마감 시간 7분을 남겨놓고 정리에 나섰다. 바로 이때, “어∼, 어∼.”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호남 STX전략실장과 뒤를 따르는 직원. 이 실장은 인수의향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채권단에 제출했다. SK그룹과 STX그룹의 대결구도가 시작된 순간이다.

하이닉스를 품기 위해 나선 SK그룹과 STX그룹.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두 본입찰 참여는 무리 없이 진행, 경쟁을 벌이게 될 전망이다.

양사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는데 차이는 18분이란 시간이 고작이다. 그러나 인수를 위한 경쟁을 앞둔 지금, 양사의 차이는 크다. SK그룹이 앞에 있고 STX그룹이 뒤쫓는 경쟁구도다.

우선 양사의 체급이 다르다. SK그룹의 재계순위는 3위다. 14위인 STX그룹 보다 11계단이나 앞섰다. 지난해 매출을 보면 이해가 더 쉽다. SK그룹의 지난해 총매출은 112조30억원. STX그룹의 18조 3600억원보다 5배를 훨씬 넘는 수치다.

증권가에 따르면 하이닉스의 인수가는 최소 2조3000억원에서 최대 3조원가량이 필요하다. 향후 운영을 위해 시설설비 투자금 등이 소요되는 부분까지 따질 경우 비용은 더욱 증가한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SK텔레콤을 앞세운 SK그룹이 STX그룹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게 사실이다. 현재 1조5000억원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을 확보해 실탄으로 사용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진다.

STX는 우량 자산매각과 중동 아부다비 펀드를 통해 인수대금 마련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자체 자금보다는 아부다비 펀드가 실탄의 중심에 설 전망이다. 이종철 STX그룹 부회장은 “아부다비 펀드로부터 먼저 하이닉스 인수를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객관적인 관점만 놓고 접근한다면 하이닉스 인수전에서 SK그룹이 우세할 것이란 게 인수합병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SK그룹은 선대 최종현 회장 때부터 굵직한 M&A로 석유화학 수직계열화를 이뤘고 이번 입찰에 참여하는 SK텔레콤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때 M&A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최태원 회장에게 고 최종현 회장의 M&A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그대로 전수돼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신흥 M&A 전문가인 STX그룹이 중동자본과 함께 나선 점은 최근 론스타펀드의 외환은행 먹튀논란과 맞물려 이른바 ‘정서법’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변수는 물론 존재한다. 객관적인 수치와 주변 정황에서 앞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경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전략을 내놓고 어떻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게 인수합병시장에 널리 퍼져있는 속설. 채권단이 객관적인 수치를 평가하기에 앞서 기업 합병 시 시너지 효과, 향후 발전 계획 등 다양한 부분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닉스 매각의 경우 인수 주체 기업의 최고경영자 인수 의지를 가장 높게 평가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더욱 그렇다. 2009년 효성그룹이 인수하려다 포기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하이닉스 인수전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강덕수 STX그룹 회장의 대결로 비춰지는 이유다.


주력사업 달라도 어쩐지 닮은 경영전략

최태원 회장과 강덕수 회장. 둘은 서로를 라이벌로 보지 않는다. 라이벌로 묶기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룹 전체 규모의 차이가 크고, 겹치는 사업 분야도 없다.

SK그룹은 정유와 통신, STX그룹은 조선과 해양플랜트 등이 주력 사업군이다. 특히 대기업 오너 일가 출신과 회사원 출신의 이력은 라이벌 관계로 이어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많은 공통점도 갖고 있다. CEO로서 재무를 중요시 여기고, 승부사 기질이 강하다. 최태원 회장은 재무 리스크를 중시하는 CEO다. 정유와 이동통신을 바탕으로 안정화를 도모하며 그룹 수직계열화를 이뤄냈다.

또 SK이노베이션 사업군 분리 방식을 통해 재무적 리스크 분산을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경영전략의 큰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재무 전문가들에게 작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식의 경영전략을 즐겨 사용한다.


그룹외형 자금력 우리가 비교우위
미래성장 사업다각화 기회 잡을 것


2005년 인천정유 인수전 패배 설욕
아부다비펀드도 든든한 지원군

강덕수 회장은 재무통으로 불린다. 그룹 자금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 M&A 능력만큼은 국내 CEO 중 최고 수준이란 평가다. 쌍용중공업을 기반으로 한 STX는 대동조선(STX조선해양), 산단에너지(STX에너지), 범양상선(STX팬오션), 아커야즈(STX유럽)를 인수, 그룹 몸집을 키웠다.

강덕수 회장의 나이는 올해 62세. 최태원 회장보다 10살이 더 많다. 라이벌이라기보다 선후배 관계에 가깝다. 올 초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신년인사회에 참석, 서로에게 덕담도 주고받았다. 당시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던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의 회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인사 자리로 분위기는 딱딱한 편이었지만 서로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시종일관 좋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하이닉스 인수전을 앞두곤 분위기가 다르다. 선후배를 떠나 경쟁자로서 제대로 붙는 모양새다. 각사를 대표하는 최고경영자로서 자신의 경영 능력을 통해 적게는 그룹 내 입지와 크게는 재계에서 입지를 확실히 굳히기 위해서다.

양사는 하이닉스 인수에 나선 이유를 ‘신성장동력 마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사업 영역 확대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것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사업 다각화·미래 성장기반 확보·글로벌 사업기회 발굴 등 다목적 포석”이라고 말했다.

STX그룹도 마찬가지. STX관계자는 “조선과 해양플랜트 중심의 사업 외에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 마련을 통해 글로벌 기업의 발판을 마련하는 취지”라고 밝혔다.

반도체 사업 인수를 통한 시너지 효과는 없느냐는 질문에 양사 모두 “시너지가 아닌 신성장동력 마련 차원의 M&A인 만큼 적정한 실사를 거쳐 (인수가격 결정에) 무리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과연 그럴까. 대답은 ‘아니오’에 맞춰진다. 무리해서라도 하이닉스를 인수하게 될 것이란 게 재계의 평가다. 하이닉스 인수합병은 단순히 인수합병 효과만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정권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던 골칫덩이 대형 매물로 현 정권에서도 하루빨리 처리하기를 바라고 있다. 정권 교체를 앞두고 레임덕 방지 차원의 불똥이 언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튼튼한 바람막이’ 역할로 충분하다.

최태원 회장과 강덕수 회장이 자존심을 걸고 맞붙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SK그룹과 STX그룹은 2005년 인천정유 인수전을 벌여 SK그룹이 승리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강덕수 회장은 STX그룹의 하이닉스 인수합병의 선봉장에 섰다. 직접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SK그룹은 하상기 SK텔레콤 사장을 주축으로 인수합병에 나선다. 하 사장은 최태원 회장의 오른팔로 SK그룹의 핵심 브레인 중의 브레인이다.


인수 전보다 인수 이후가 더 중요

문제는 하이닉스 인수 이후다. 다음은 인수합병 전문가의 말이다.
“하이닉스 매각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채권단 일부에선 정치권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유야 어찌됐든 SK그룹과 STX그룹의 인수 의지가 매우 강한 것만은 확실하다.

시너지 효과를 전혀 거둘 수 없지만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시간이다. 두 곳 모두 인수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 달이 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이닉스를 인수해도 반도체 1위 업체로 성장시키기보다 현재 위치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경영전략을 마련하는 쪽에 (SK그룹과 STX그룹이) 무게를 둘 것으로 알고 있다. 삼성전자와 격차가 줄어들었지만 역전은 불가피 하다고 판단, 시설 확장 등 투자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투자만 나선다는 것이다.

하이닉스는 반도체 회사다. 신기술 개발 등의 꾸준한 투자와 시설설비가 있어야 하는 사업 분야다. 결국 인수합병 승자는 8월 이뤄질 본 입찰 전 인수 이후 운영 방안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이닉스 운영 방안에 대해 묻는 질문에 SK텔레콤과 STX그룹 관계자는 “실사를 마친 뒤 신성장동력 마련이란 큰 틀에서 접근해 구체적인 경영전략을 준비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인수 전 실사와 8월 말 본입찰을 앞두고 있는 SK텔레콤과 STX그룹. 최태원 회장과 강덕수 회장이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업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