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멋모르고 웃으며 덥석 잡았었네. 어찌나 곱고 따스하던지. 그 짜릿한 촉감 일생동안 가슴에 파묻겠노라 다짐했던 시절 있었네. 잠 못 드는 밤이란 그런 것이었나. 신 새벽 샘물을 길러 뜨거운 열기 청아하게 감길 때 저 벌건 햇덩이가 일순 내 가슴으로, 훅!

 

 

 

살얼음이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일월의 어느 따스한 오후였었지. 바람도 멎은 듯 강변엔 적막만이 흐르고 수레바퀴 지나가며 길섶으로 몰려 얼었던 황톳길이 반지르르 물기를 흘리며 툭툭 풀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변 억새 숲에 머물던 한 쌍의 꿩이 무엇이 틀어졌는지 동시에 수직으로 솟구쳐 허공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커다란 원(圓)을 그리다 얕은 강물로 내려와 한 모금 목을 축이곤 제 길로 사라져갔다. 그 바람에 잠잠하던 강물이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리다 강둑에 앉아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한 사내를 흘낏 쳐다보는 것이었다.

 

 

 

오일장(五日場)은 언제나 늦게 파했다. 겨울장날이 끝나는 장터엔 언제나 깔깔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손님을 부르던 커다란 목소리들과 북적북적하던 풍경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묘한 공허가 어둑한 빈 공터를 맴돌았다.

그날은 밤안개가 자욱하니 개울가에 번지며 축축이 우수에 젖은 풍경을 연출했다. 어머니와 누이는 종일 장터에서 면발이 굵은 국수를 삶아 손님상에 올리느라 허리한번 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국수를 다 팔고 빈 무쇠 솥을 메고 귀가하던 날의 행복했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개울을 받치고 있던 삐거덕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널 때 뒤 따라오던 아버지의 구수한 육자배기는 내가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였음을!

 

 

 

◇서양화가 강인주(KANG IN JOO)

빨간색 무늬의 아틀리에 문(門)이 눈길을 사로잡는 경남 김해에서 작업하는 강인주 화백. 가슴 저 밑바닥 간직해 온 아련한 유년의 추억을 노래하는 화면은 그리운 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편지사연처럼 따스하고도 깊은 조형미를 드러낸다. 그는 이러한 작품세계에 그대가 혹은 내가 그대에게 전하는 마음의 소리인 ‘The Sound’라는 명제를 부여했다.

자연(自然)이 들려주는 순수의 속삭임, 어머니의 자애로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밀어가 그 안에 흐른다. 작가는 붓 대신 뾰족한 여러 개의 유화나이프로 캔버스에 물감을 얹어 그려나가는 매우 독특하고도 정교한 작업과정을 보인다. 이렇게 중첩된 마티에르는 웅숭깊은 색채와 스스로 정화(淨化)하는 자연이 엮어내는 무궁한 스토리를 전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오직 외길. 자연은 변함이 없고 바라볼수록 그 진면목을 묵묵히 전해준다. 어느 날 캔버스 앞에 앉은 내게 그 자연이 자작자작 흐르는 강물 모퉁이에 걸려있는 가지에서 한 송이 동백을 피워낸 이야기를 슬쩍 꺼내주면 그만 나는 밤을 꼬박 새워 그 꽃을 만난다”라고 전했다. 강인주 화백은 경인미술관, 갤러리 더 스페이스, 아리수 갤러리, 동백아트센터(부산) 등에서 개인전을 26회 가졌다.

 

△글=권동철, 리더피아(leaderpia) 201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