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④

▲ 신용우 소설가겸 칼럼니스트.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자객들이 시해할 당시 황후의 시신을 외국인들이 보았다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당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았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우선, 명성황후 시신의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는 여인은 황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뜰 아래로 내려가서 살해된 뒤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고 했다. 현흥택은 자신을 결박하고 황후의 거처를 묻던 낭인들이 국왕의 처소에서 ‘와’ 하는 소리가 나자 자신을 놓고 그리로 몰려가는데 그때 황후의 시신을 보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껏 사실로 믿었던, 그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한 낭인 이시즈카 에조가 썼다는 <에조보고서>에 쓰여 있는 ‘낭인들이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 발가벗긴 후 국부 검사를 하고 기름을 부어 소실시켰다’는 대목은 어찌 되는 것인가?

현흥택은 낭인들이 자신을 놓아두고 국왕의 처소로 우르르 몰려갈 때 보았다고 했고, 시신에 수건을 덮었다는 여인은 황후가 숨을 거둬서 수건까지 덮었다고 했는데, 국부 검사를 하고 기름으로 소실한 그녀의 시체를 현흥택은 어떻게 보았으며, 궁녀는 어떻게 수건을 덮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당장 여인이 보았다는 시신과 현흥택이 보았다는 시신도 다른 시신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것을 종합해볼 때 명성황후의 시신을 정확하게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작가의 관점에서 보는 그날의 목격자들은 자신만이 상상하는 황후의 시신을 본 것이다. 같은 옷을 입은 여인들을 모두 황후라고 단정을 지었고, 일본인들은 그들대로 자신들만이 생각하는 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것이다. 러시아에서 공개한 외교문서에 사바틴이 말했듯이 당시 피해자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그 누구도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주관적이라 자신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도 그것을 스스로 보완해서 전혀 다른 기억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날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들도 자신만의 명성황후를 기억해 놓고는 누군가 물으니 그 기억을 대답했을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찾은 뒤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오전에 그들이 정신적인 안정도 찾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서둘러서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자존심을 짓밟고 겁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목적 달성을 위해서 자신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이 자행한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명성황후가 확실하게 시해당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일부러 황후의 시신이라고 하면서 궁궐 내에서 불에 태운 것이 결국 그런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미 ‘에조보고서’에서 국모의 시신을 발가벗기고 국부 검사를 했다고 한 행위 자체가 국모에게 치욕을 안겨 모독한 것으로 기록에 남김으로써, 두고두고 조선의 자존심을 짓뭉개 버리겠다는 천인공노할 흑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사람들이 명성황후를 시해당한 쪽으로 몰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러시아 공사 베베르이다.

러시아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베베르는 가장 정의롭고 발 빠르게 명성황후 시해의 주체를 밝히기 위해 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신속한 행동은 어떻게든 일본을 궁지에 빠트리고 자기네가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얻기 위해서 꾸민 연극이었다.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것이 일본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물론 러시아가 그 자리에 비집고 들어오기 위한 수단이었다. 러시아 외교문서에서 사바틴은 분명히 5시 50분까지 일본 낭인 자객들은 황후를 찾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베베르는 아무도 시신을 보지도 못했건만 조선의 국모가 시해당한 것으로 고종에게 보고한다. 그에게 조선의 국모가 시해당하고, 않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 기회에 조선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고종에게 보여줌으로써 조선에 와 있는 외국공사 중에서 가장 신임받는 공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급선무였다. 거기다가 내친김에 한 가지를 더 욕심낸다. 어차피 일본이 일을 낸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증인으로, 일을 벌인 주체는 드러난 사실이니 국모가 시해된 것으로 해야 백성들의 공분을 자아내 일본을 쉽게 몰아낸다는 속셈이다. 그래야 자신이 목표한 바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베베르는 고종이 신뢰하는 알렌 같은 사람들과 일본을 제외한 조선 주재 외국공사들과 연합해서 일본인들을 추궁한 결과, 명성황후가 그날 사건에서 시해당한 것으로 결론을 내게 한다. 그 사건에 연루된 47명의 일본인 낭인들이 기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모든 일은 일본이 저지르고 거기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힘없는 조선으로서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야욕을 막아내는데 러시아 이상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베르가 하는 대로 두고 보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또 그 길만이 아직 시해당하지 않은 명성황후를 일본의 추적을 피해서 살리는 길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5회로 이어집니다).